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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100주년과 한국교회] 정동제일교회, 목사부터 성도까지 온몸으로 항거하다
송기성 정동제일교회 목사가 지난 8일 서울 중구 교회의 벧엘예배당에서 이필주 목사가 설교했던 강대상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송지수 인턴기자   1919년 3·1운동에 민족대표로 참여했다가 투옥됐을 때의 이 목사(오른쪽)와 박동완 전도사.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정동제일교회 안마당에 위치한 ‘이필주 사택 터’ 표지판. 송지수 인턴기자 서울 중구 덕수궁 뒤편 정동제일교회(송기성 목사) 안마당. 국가보훈처가 지정한 현충시설인 ‘정동교회 이필주 사택 터’가 표지판으로 남아있다. 1919년 2월 27일 당시 ...
입력:2019-02-13 08:05:01
일본 속 조선 유학생, 시대의 흐름 읽고 독립의 불을 지피다
2·8독립선언을 주도했던 일본 유학생들이 1920년 출옥한 뒤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맨 왼쪽이 1919년 2월 8일 조선YMCA에서 “지금부터 조선청년독립단을 발족한다”고 긴급 동의했던 최팔용. 서울YMCA 제공   2·8독립선언서의 첫 장. 서울YMCA 제공 “대한 독립 만세!” 1919년 2월 8일 도쿄 지요다구 간다의 재일본도쿄조선YMCA회관(조선YMCA)에서 터져 나온 함성이 폭설이 내리던 거리를 갈랐다. 400여명의 조선인 유학생들은 일왕이 사는 황거(皇居)에서 불과 3㎞ 떨어진 곳에서 독립의 열기를 분출했...
입력:2019-02-06 08:05:01
“3·1운동은 우리가 근대 민족으로 거듭난 역사적 사건”
김승태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장이 지난 24일 서울 마포구 연구소에서 국민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송지수 인턴기자 국민일보는 지난 1일부터 ‘3·1운동 100주년과 한국교회’ 연중기획을 보도하고 있다. 1부에선 3·1운동의 역사적·사상적·신학적 배경을 조명했고 오해가 많은 사실들에 대한 검증을 진행했다. 기독인 민족대표 16인 가운데 변절자는 2명뿐이란 점과 3·1운동은 주일을 피해 거사일이 결정됐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100년 전 교파의 벽을 넘어 하나로 뭉쳤듯이 3·1정신으로 분단을 극복하자는 메시지도 ...
입력:2019-01-30 08:05:01
[단독] 美 기독교인들 일제 핍박받는 한국인 위해 대통령에 청원서
신한민보 1919년 4월 3일자 두 번째 지면. ‘셔양 교우들이 한국을 도음’이란 제목의 기사가 맨 오른쪽 상단에 실려 있다.국사편찬위원회 제공 미국의 그리스도인들이 1919년 3·1운동 직후 일제의 학정으로 핍박받는 한국인을 도와달라는 내용의 연명(連名) 청원서를 미국 대통령에게 보낸 사실이 처음 확인됐다. 서울신학대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소장 박명수 교수)는 미국 켄터키주 윌모어의 애즈버리대 교수와 학생, 이 지역 목회자 128명이 1919년 3월 한국을 도와달라며 우드로 윌슨 대통령에게 연명 청원서를 보냈다는 내용의 신한민보 기사...
입력:2019-01-29 08:05:01
‘유관순의 선생님’ 앨리스 선교사를 아시나요
유관순의 선생이자 공주 영명학교 설립자인 앨리스 샤프 선교사. 국민일보DB   1919년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유관순 열사의 수형기록 사진. 한국선교유적연구회 제공 1910년대 당시 충남 목천군 이동면(현 천안시 병천면)은 서울과 공주를 잇는 교통의 요지였다. 외국인 선교사들은 이 부근을 자주 왕래하며 교회를 세웠다. 같은 면 지령리(현 용두리)에도 교회가 세워졌고 선교사들이 방문했다. 이곳에서 자란 소녀가 푸른 눈의 여성 선교사를 만난 것은 이 무렵이다. 선교사는 소녀가 교회에 나오는 것을 기뻐했고 성경을 술술 암송하는 것을 기특...
입력:2019-01-28 08:05:01
영화 ‘말모이’ 인기에 선교사가 만든 ‘영어사전’ 재조명
HG 언더우드(앞줄 가운데)와 JS 게일(앞줄 오른쪽) 선교사가 1906년 성경번역위원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국민일보DB   언더우드 선교사가 만든 ‘한영자전’. 국민일보DB ‘사전의 재발견’ 기획전이 열리고 있는 서울 용산구 서빙고로 국립한글박물관 기획전시실. 23일 이곳에 들어서자 HG 언더우드와 JS 게일 선교사의 이름이 눈에 띄었다. 그들의 이름 아래엔 두 선교사가 1890년대에 만든 영한사전과 한영사전이 관람객을 맞이했다. 빛바랜 종이에 또박또박 기록된 영어 단어와 한글의 조합은 지금의 사전과 다르...
입력:2019-01-23 08:05:02
만세 운동에 기생들도 참여했을까
1919년 3월 1일 만세를 하며 행진하는 사진 속 여성들은 기생일까. 많은 언론이 이를 경기도 수원의 기생들이 시위한 것이라고 전했지만 국민일보 취재 결과 근거가 불확실한 것으로 드러났다. 3·1운동 당시 조선총독부는 엄격한 보도 통제를 실시했다. 때문에 현장 보도 사진이 드물다. 문제의 사진은 1919년 3월 5일자 일본의 석간 오사카아사히신문 2면에 실렸다. 사진 설명은 ‘1일의 경성 시내’라는 제목 아래 ‘조선인 여학생이 만세를 외치며 전찻길을 행진한다’라고 돼 있다. 왼쪽 사진엔 ‘남대문통의 해군의장대’, 아래 사진엔 ...
입력:2019-01-23 08:05:02
민족정신이 숨쉬던 교회, 물산장려·사회정화운동 펼쳐
1933년 10월 대구에서 열린 제4회 조선주일학교대회의 금주운동 결의 모습. 사진 아래 술을 마귀에 빗댄 구호 ‘주마정벌군식장광경(酒魔征伐軍式場光景)’이 적혀 있다. 한국기독교역사박물관 제공 한국교회는 1919년 3·1운동뿐 아니라 이후 활발히 펼쳐진 민족운동에서도 구심점 역할을 감당했다. 물산장려운동과 금주·금연 운동, 여성·청소년·농촌 운동 등 다방면에서 민족의식을 기르고 사회계몽을 하고자 노력했다. 일제의 기독교 탄압 본격화 1910년 경술국치 때부터 한국교회와 재한 외국인 선교사의 영향력을 견...
입력:2019-01-23 08:05:02
만세운동 주동자로 몰려 구타 당한 영국 선교사의 배상금, 첫 신사참배 반대의 밀알 되다
존 토머스 선교사가 일제에 받은 배상금으로 1924년 설립된 동양선교회 강경예배당 전경. 서울신학대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 제공   토머스 선교사의 진술서가 담긴 영국 외무성 문서. 당시 경성의 영국 총영사관 대리총영사인 윌리엄 로이즈의 서명이 들어있다. 서울신학대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 제공 1919년 3·1운동 직후 일경에 무차별 폭행을 당한 영국인 선교사의 ‘맷값’으로 지어진 교회가 있다. 동양선교회(현 오엠에스선교회) 조선감독 존 토머스 선교사는 1919년 3월 20일 충남 강경에서 만세운동 주동자로 몰려 일경에 폭행을 당...
입력:2019-01-23 08:05:01
3·1운동 거사일은 왜 주일을 피해서 결정했나
미국 하와이 대한인국민회에서 1919년 발행한 대한독립선언서. 태극기 위에 ‘3월 1일’이라고 날짜가 표시돼 있다. 독립기념관 제공 3·1운동은 주일을 피해 거사일이 결정됐다? 정답은 ‘그렇다’이다. 3월 1일이란 날짜 자체가 주일 성수를 우선시하는 기독교인을 배려해 정해졌다. 종교 간 배려와 연합의 중요한 증거다. 기독교 천도교 불교 등 종교인으로 구성된 민족대표 33인은 당초 1919년 3월 3일 월요일을 거사일로 모의했다. 그해 1월 22일 사망한 고종 황제의 발인 예식이 3일로 예정돼 있어 많은 사람이 서울 종로에 모일 ...
입력:2019-01-16 08:05:01
평양-경성 연결한 장·감연합회, 전국적 만세운동의 기반 됐다
1921년 3월 1일 중국 상하이 올림픽극장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최로 열린 3·1 독립선언 2주년 기념식. 독립기념관 제공 3·1운동은 기독교와 천도교, 불교의 합작품이었다. 장로교와 감리교의 협력은 각 교단이 부흥했던 평양과 경성을 연결한 가교가 됐다. 이 같은 연합은 당시 민중의 참여를 이끌어낸 원동력이었다. 일제강점기, 종교 지도자들이 나서지 않고는 전국적 만세운동은 불가능했다는 게 학계의 일반적인 평가다. 정병준 서울장신대 교수는 15일 국민일보와의 통화에서 “당시 인원을 모으고 자금을 동원할 곳은 전국 조직을 갖췄던 ...
입력:2019-01-16 08:05:01
[한국기독역사여행] “주님 양 돌보는 일 말고는 할 수 없다" 인민군에 맞서다
박기천(1923~1950)   이진포 사모(1950년 작고). 빨치산 피해자였다.   박기천 전도사가 1950년 9월 10일 주일예배를 마친 후 인민군에 끌려갔던 경남 거창군 가천교회 현재 모습. 종탑과 성서벽화가 평화롭게 보인다. 그러나 낡은 시골교회 예배당이었다.   고향 김천 감주교회 시절의 박기천(위쪽 사진 원 안). 박기천 아들 박래영 목사. 1950년 부모가 인민군에 희생됐다. 가천교회 부근에 기념관을 건립 중이다.   거창 산골 북상교회 현재 모습. 6·25전쟁 전 빨치산 출몰지역이었다. 박기천 전도사는 전쟁 전에 ...
입력:2019-01-11 01:30:01
선교사들 해외에 3·1운동 상황 적극 알려
경기도 화성시 향남읍 제암리의 한 민가가 불탄 모습. 일제는 3·1운동에 대한 보복으로 제암리교회를 비롯한 일대 민가를 불태웠다. 프랭크 W 스코필드 선교사가 1919년 4월 17일 현장을 찾아 촬영했다. 국민일보DB 선교사들이 독립운동을 지지하지 않았다는 지적은 사실일까. 3·1운동이 일어났던 1919년엔 이미 수백 명의 선교사가 활동 중이었다. 감리교와 장로교 총회 임원 중에도 선교사들이 여럿 있었다. 그해 10월 평양에서 열린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S A 모펫 선교사가 총회장이 됐을 정도로 선교사들은 활발하게 사역했다. 하지만 독...
입력:2019-01-09 08:05:01
최남선 “정의·자유·독립은 기독교 전해지며 생겨난 새말”
정의 자유 비폭력을 강조한 3·1운동 독립선언서의 공약 3장. 국민일보DB “1956년 2월 어느 날이었다. 병상에 누워있던 육당을 위문 차 찾아갔다. ‘선생이 쓰신 3·1 독립선언서를 읽으면 어떤 기독교 사상가에 의해 쓰인 것이라고 느껴질 정도다’라고 물었더니 육당은 대뜸 ‘내게서 기독교 사상을 빼면 아무것도 없지’ 했다. 그러면서 당신은 어릴 적부터 신구약 성서만 아니라 외전(外典)까지 탐독했다는 것, 인물로서는 레프 톨스토이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 신앙인으로서는 상동교회 전덕기 목사의 영향을 많이 받...
입력:2019-01-09 08:05:01
[단독] “장로교회 헌법과 임정 임시헌장의 공통분모는 민주공화제”
대한예수교장로회 헌법은 1907년 제정돼 수정을 거듭하다 1922년 완성됐다. 사진은 1934년 개정판 원문. 치리장로의 직무(왼쪽)와 임원 자격에 대한 내용이 담겨있다. 장로회신학대 도서관 제공   임희국 장로회신학대 교수 1919년 공포된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초대 헌법 ‘대한민국 임시헌장’과 1907년 제정된 한국 장로교회의 ‘대한예수교장로회 헌법’ 사이에 ‘공화제’와 ‘대의민주주의’란 공통점이 발견됐다는 주장이 나왔다. 왕정과 식민시대에 민주공화제를 천명했다는 점에서 임시헌장과 장로교회 ...
입력:2019-01-09 08:05:01
민족대표 기독인 16명 중 14명은 독립의지 지켰다
대한민국 정부가 1962년 3월 1일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에서 개최한 ‘민족대표 33인 중 고인(故人) 합동 추념식’ 모습. 정부는 공적조사를 거쳐 민족대표들에게 건국훈장을 수여했다. 국가기록원 제공   이미지를 크게 보려면 국민일보 홈페이지에서 여기를 클릭하세요   “민족대표 33인 대부분은 1920년대 친일로 돌아섰다. 3·1운동 당시 민족대표들은 탑골공원으로 가지도 못하고 태화관에 있다가 조선총독부에 자수했다.” 역사 강사 설민석씨가 자신의 책과 특강을 통해 밝혔던 내용이다. 국민일보는 민족...
입력:2019-01-03 08:05:01
기독인 12인 “조선 독립 인정하라” 일제 총독에게 날 선 편지
서울 경성부청 앞에 모인 군중이 1919년 3월 1일 만세를 외치고 있다. 이 사진을 회보에 실었던 ‘적십자사’는 “여성과 소녀를 포함한 수천명의 열렬한 조선인들이 손을 들고 만세를 외치고 있다”고 했다. 국민일보DB   3·1운동에 앞서 평안도와 황해도 일대에서 일어난 ‘105인 사건’으로 체포된 조선인들이 일경에 끌려가는 장면. 국민일보DB 기독교인들이 3·1운동의 전면에 나선 배경에는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과 1909년 백만인구령운동이 있었다. 부흥운동은 교세 성장을 이끌었다. 일제가 기독교를 ...
입력:2018-12-31 08:05:01
[단독] 3·1운동 종교인 피검자 중 51%가 기독교인이었다
1919년 3·1운동 당시 배포된 독립선언서 원본.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핵심 4인 이름은 가나다 순서를 따르지 않고 맨 앞에 나온다. 손병희(천도교) 길선주(장로교) 이필주(감리교) 백용성(불교) 순이다(파란색 표시).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제공   조선총독부가 1920년 1월 작성한 망동사건처분표 표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제공   종교별로 분류한 내용. ‘야소교’아래 감리파 장로파 조합파 등으로 구분돼 있다(빨간색 표시). 별표는 여성의 숫자다.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제공 총독부 ‘망동사건처분표’ 분...
입력:2018-12-31 08:05:01
[한국기독역사여행] 흥남의 크리스마스 기적 … 9만 2000명 살리다
근대의학의 산실 서울역 북쪽 도동 옛 세브란스병원 터의 의사 현봉학 동상. 함흥 미션스쿨 영생여고보 교목 아들이었던 현봉학은 구제를 위해 의사가 되기로 하고 1941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에 입학했다. 지금의 남대문교회 찬양단원이기도 했다.   2016년 12월 현봉학 동상 제막식의 문재인 대통령(오른쪽·당시 민주당 고문).   현봉학이 전쟁 고아를 돌보고 있다. 흥남철수 이후로 추정된다. 오른쪽은 1950년 12월 20일 흥남철수 광경. 철수 후 흥남부두는 폭파된다.   현봉학이 봉사하던 후암동 가마쿠라보육원. 지금의 영락...
입력:2018-12-28 02:15:01
[한국기독역사여행] 북녘 향한 옥탑방 思婦曲… “기도 속에서 늘 당신을 만납니다”
장기려 박사 (1911~1995)   부산 송도해수욕장이 보이는 고신대복음병원 3병동 옥상. 의사 장기려는 1985년 이 옥상에 옥탑방을 마련해 기거하기 시작했다. 주변의 염려에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집을 가졌다”고 말하곤 했다.   장기려 박사의 아내 김봉숙(2004년 작고).   1951년 부산 영도 제3교회에서 시작된 복음진료소. 장기려 박사가 초대 원장이었다.   위 사진은 부산 송도 고신대복음병원(옛 복음진료소). 장기려 추모 예배 현수막이 걸려 있다. 아래 사진은 부산 동구 장기려기념관 &lsqu...
입력:2018-12-14 02:30:01
“일제에 검열 당한 설교집 그대로 펴내 무언의 저항”
‘종교계 저명사 강연집’의 영인본 표지. 강연집에 실린 미감리중앙교회 김창준 목사의 설교 ‘최대의 모범’ 첫 장을 보면 일본 조선총독부의 검열로 삭제된 부분을 점선으로 표시해 놓았다.   한경국 장로회신학대 초빙교수가 10일 ‘종교계 저명사 강연집’의 의의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송지수 인턴기자 1922년 7월 활문사에서 출간한 ‘종교계 저명사(著名士) 강연집’은 한국교회의 두 번째 설교집이다. 총 20명의 설교가 실렸는데 그중 7명이 3·1운동 민족대표다. 3·1운동 100주년을 앞두고 민...
입력:2018-12-10 08:05:01
[발굴! 이 사람] 일본 한복판서 대한독립을 외치다
전도유망한 20대 유학생으로 일본 제국의 심장부인 도쿄에서 1919년 2·8독립선언을 주도하다 수감됐다. 감리교인으로 일본에서 다시 미국 웨슬리안대로 유학길에 올랐고, 뉴욕 컬럼비아대 대학원 재학 중엔 3·1운동 정신을 담아 ‘삼일신보’를 창간해 언론 활동을 했다. 1931년 워싱턴 아메리칸대에서 ‘한국의 농촌경제’를 주제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고 이듬해 식민지 조국으로 귀환, 연세대 전신인 연희전문에서 경제학을 가르쳤다.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생애 두 번째 피검된 후 해방을 맞았다. 기독인 독립운동가로 대한...
입력:2018-12-06 08:05:01
[한국기독역사여행] 교회서 성장한 혁명음악 작곡가, 중국의 별 되다
  광주광역시 남구 정율성로 정율성 생가(오른쪽 담 안)를 방문한 광주대학교 학생들이 친구들을 안고 포즈를 취했다. 젊은이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공주놀이 사진찍기’이다. 멀리 정율성이 다녔던 광주양림교회 첨탑이 보인다. 당시 교회 일대는 야트막한 동산이었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6·25전쟁 후 중국에서 음악활동을 하던 때의 정율성, 광주양림교회와 교인들의 1930년대 사진, 광주양림교회 최학휴 목사가 교회 역사를 설명하는 모습, 광주양림교회 사거리 정율성 흉상.   양림교회와 이강하미술관이 ...
입력:2018-11-30 02:25:02
[발굴! 이 사람] “한국 임시정부 승인을”… 美에 촉구
제럴딘 피치 여사   1947년 서울 경교장을 방문한 피치 선교사 부부(아랫줄 맨 오른쪽)가 김구 선생(아랫줄 가운데), 프란체스카 여사(아랫줄 왼쪽 두 번째)와 찍은 사진. 서울신대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 제공   박명수 서울신학대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장이 22일 열린 ‘한·미 관계와 기독교 특별 심포지엄’에서 개회사를 하고 있다. 부천=강민석 선임기자 “일부 사람들은 (한국에 대한) 일본의 침략이 만주 침략에서 시작됐다고 보나 사실 일본은 1905년 한국을 강제 병합했다.… 이에 벗어나기 위해 한국에서...
입력:2018-11-22 08:05:01
“찬미가 찬양가 통해 서양음악 처음 알려”
정운형 연세학풍연구소 연구위원(왼쪽)이 20일 서울 연세대 신촌캠퍼스 원두우신학관에서 1930년대 연희전문 남성 사중창단의 활약을 소개하고 있다.   연세대학교의 전신인 연희전문학교가 일제 강점기인 1930년대 서양 근대음악 확산의 축이었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고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선교사가 집대성한 ‘찬양가’는 정식 악보가 수록된 한국 교회음악의 시초였다. 연세대 신과대와 음악대는 20일 서울 신촌캠퍼스 원두우신학관 예배실에서 ‘연희전문학교의 음악교육과 기독교 정신’을 주제로 학술 심포지엄을 개최했...
입력:2018-11-20 08: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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