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소교는 정치에 관여 않는다’… 고종 마음 움직여

일본 주재 청나라공사관 참사관 황준헌(사진)이 1880년 저술한 외교 방략서 ‘조선책략’.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고 1883년 미국은 루셔스 하우드 푸트를 특명전권공사로 임명하고 조약을 마무리하도록 조선으로 파견했다.




조선은 천자 제후 대부 사 서의 중화질서 아래 살던 유교 국가였다. 여기에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천주교의 가르침은 조선 사회 자체를 흔드는 것이었다. 조선은 천주교가 가진 위험을 잘 인식하고 있었고, 여러 차례 박해를 통해 천주교를 막고자 했다. 1866년 병인박해에서 8000명이나 되는 사람이 순교했다고 한다.

그러면 기독교를 막고자 했던 조선이 어떻게 문을 열고 조미수호통상조약을 맺을 수 있었는가. 그 실마리는 1880년 5월 조선의 문을 열고자 부산에 온 미국 제독 슈펠트가 조선 정부에 보낸 서한에 있다. 이 편지에서 미국은 “독립국의 종교제도나 정치제도를 방해하거나 거기에 개입한 적이 없다”고 밝히고 있다. 이것은 미국이 조선의 유교 국가체제를 인정하겠다는 뜻이다. 이 편지가 고종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못했지만 청의 북양대신 이홍장에게 들어갔다. 이홍장은 조선이 미국과 조약을 맺는다고 해도 미국은 프랑스와 달리 기독교를 강요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고, 조선과의 조약을 주선하게 됐다.

1880년 여름 김홍집을 대표로 하는 조선의 2차 수신사가 일본을 방문했다. 이때 주일 청국 참사관 황준헌은 ‘조선책략’을 써서 김홍집에게 줬다. 이 책에서 황준헌은 러시아의 남침을 막기 위해 조선은 미국과 조약을 맺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미국의 종교인 개신교는 천주교와 달리 좋은 종교라고 소개했다. 그는 유교에 주자학과 양명학이 있는 것처럼 기독교에도 천주교와 야소교(개신교)가 있으며 “야소교의 종지는 ‘천주교와 달리’ 일절 정치에 관여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이어서 “그 종교(야소교)의 본의는 사람을 권해 착해지도록 하는 것이니, 우리 중국의 주공이나 공자의 도보다 어찌 몇만 배 낫지 않은가”라고 반문한다. 이어 조선에는 이미 유교가 뿌리를 내려 자리잡고 있는데, “그렇다면 저들의 전교(傳敎)를 내버려 둔 들 또한 무엇이 해로운가”라고 쓰고 있다.

김홍집은 ‘조선책략’을 갖고 와 고종에게 전했고 고종은 이것을 읽고 조미조약을 맺을 것을 결심했다. ‘조선책략’은 엄청난 파문을 가져왔다. 조선의 유림은 황준헌의 기독교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에 분노하며 상소를 올려 조미조약 체결을 반대했다. 그 대표적인 것이 1881년 ‘영남만인소’다. 안동 유생인 이만손이 주도한 영남만인소는 “불행히도 사악한 예수교라는 것이 해외의 오랑캐 종족들에게 나와서 예의나 염치는 물론 말할 것도 없고 윤리와 강상(綱常)이 일체 없어져 버리니 다만 하나의 짐승일 뿐이고, 하찮은 존재가 될 뿐입니다”라고 비판하며 개화를 반대했다. 이것이 유명한 ‘신사(위정) 척사운동’이다.

유림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힌 고종은 미국과 조약을 맺는 것은 좋지만 미국의 종교는 받아들일 수 없다고 생각했다. 황준헌이 천주교와 개신교가 다르다고 말하지만 일반인들은 이 둘을 구분하기 힘들기 때문에 미국과 조약을 맺더라고 “교회를 세우지 않겠다”는 불립교당(不立敎堂) 조항을 넣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 조항에 대해 미국의 슈펠트는 매우 분명한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 조미조약을 중재하던 이홍장도 조선이 그 주장을 고집할 경우 조약 자체가 체결될 수 없다고 생각해 조약에 이 문제를 언급하지 말자고 제안했다.

결국 슈펠트와 이홍장은 조미조약에는 종교에 관한 내용을 포함하지 않았다. 슈펠트는 종교에 관한 어떤 조항도 조약에 넣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미국 헌법은 신앙은 국가가 관여할 문제가 아니며 정부는 종교를 제한하는 어떤 법률도 만들지 말아야 한다고 믿었다. 또한 이홍장은 기독교 선교를 염려하는 조선 측에 선교를 허락하는 내용이 조약에 없으니 유림을 설득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미국은 누구나 자신이 믿고 싶은 것을 믿을 종교의 자유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1883년 10월 조선에 파견된 푸트 공사에게 외국 종교의 전파가 조약에 포함될 적절한 항목은 아니지만 “조선에 있는 모든 미국 시민들에게 양심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자유는 확보돼야 한다”고 봤다. 이에 국무부는 푸트 공사에게 적절한 근거와 함께 거중 조정 능력을 발휘해 “조선 사람들로 하여금 모든 선교사에게 친절하게 대하도록 권고하기를 원한다”는 훈령을 내렸다. 미국 정부는 조선에서 선교사들이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주길 원했던 것이다.

당시 조미조약이 맺어졌다는 소식을 들은 미국에서는 조선에 선교사를 파송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1884년 여름 푸트 공사는 조선 정부에 미국은 종교의 자유를 가장 중요한 원칙 가운데 하나로 생각하기 때문에 종교적 핍박을 극히 혐오한다는 견해를 전했다. 조선은 여기에 대해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만일 조선 정부가 특정 종교에 대해 박해를 한다면 미국과의 마찰을 각오해야 한다는 것은 잘 알게 됐다. 미국 정부의 이런 기초작업 위에 1884년 9월 앨런 선교사가 조선에 오고, 그 다음 해인 1885년 4월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선교사가 오게 된 것이다. 기독교를 향한 문은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열리고 있었다.

박명수 서울신대 명예교수·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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