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인에게 난폭하게 굴어 불태웠다? 그 진실은…

미국 해군 수로국 셰넌도어호 페비거 함장과 와추세트호의 슈펠트 함장이 각각 조사해 1869년 제작한 평양만(위쪽)과 대동강 일대 해도. 미국 보스턴 공립도서관 노만레벤탈지도센터 제공



 
조선 후기 지리학자 김정호가 1834년 제작한 지도 '청구도'에 그려진 대동강 하류 일대. 박명수 교수 제공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는 1866년 9월 2일 대동강 변에서 당시 평양 군민들의 공격을 받고 불에 타버렸다. 이때 영국인 로버트 토머스 선교사도 순교했다. 약 한 달이 지나고 중국 지푸의 미국 영사 샌포드에게 이 소식이 전해졌다. 미국은 제너럴셔먼호가 왜 공격받았는지, 선원은 어떻게 죽었는지, 생존자는 있는지 등을 알고자 했다.

미국은 1867년 1월 아시아함대 와추세트호의 슈펠트 함장을 보내 이 사건을 조사했다. 하지만 조선은 협조하지 않았다. 그러나 평양감사 박규수는 분명히 미국이 다시 올 것이며, 그때를 위해 소위 ‘의답조회’를 작성해 같은 대답을 하도록 했다. 문서는 조선 정부가 미국에 전달한 이 사건에 관한 유일한 공식문서였다. 그러면 이 문서는 얼마나 진실을 말하고 있을까.

박규수는 ‘의답조회’에서 제너럴셔먼호가 처음부터 조선인에게 난폭하게 행동했기 때문에 이런 사건이 일어났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초기 제너럴셔먼호와 조선인 사이에 심각한 갈등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사람들은 배에 몰려와 이양선을 구경하고 서로 물건을 매매하기도 했다. 토머스는 이들에게 과자와 성경을 나눠줬다.

제너럴셔먼호와 조선 측이 충돌한 이유는 중군(中軍, 일종의 지역 사령관) 이현익이 납치됐기 때문이다. ‘의답조회’는 이현익이 제너럴셔먼호와 조선인의 마찰을 막고자 배를 타고 감시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제너럴셔먼호가 이현익을 납치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현익의 구술을 기록한 ‘패강록’을 보면 제너럴셔먼호는 조선 측이 자신들을 유인해 상륙시킨 다음에 섬멸하려 한다는 것을 알았고, 이것을 막기 위해서 이현익을 납치했다고 했다. 이 사건을 연구했던 제임스 게일 선교사도 먼저 조선 측이 공격을 해왔기 때문에 제너럴셔먼호가 이현익을 납치했다고 본다.

또한 ‘의답조회’는 평양 군민이 이현익을 구출하기 위해서 땔나무에 불을 붙여 제너럴셔먼호를 공격하니 배에 저장된 폭약이 굉음을 내며 폭발했고 사람은 다 죽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정부의 공식문서인 ‘평양감영계록’에는 배가 불타고 있을 때, 토머스와 중국인 조능봉이 배에서 나와서 살려 달라고 요청했으나 군민에 의해 살해당했다고 기록됐다. 1884년 평양에 가서 이 사건을 조사한 미국공사관 무관 버나돈은 토머스는 평양 감영에 끌려갔으며, 이곳에서 중국으로 보내 줄 것을 요청했으나 평양감사는 이를 무시하고 처형했다고 했다.

제너럴셔먼호 사건의 또 다른 문제는 생존자 여부다. 제너럴셔먼호를 조선에 보낸 메도우사에 의하면 이 배에는 24명이 타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 측은 죽은 사람이 모두 20명이라고 밝혔다. 그러면 나머지 4명은 어떻게 됐을까. 미국은 생존자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런 상황에서 20년 이상을 청과 조선 사이 밀무역에 종사했고, 지푸의 외국인들과 잘 아는 중국인 우문태는 1867년 여름 평양에 갔을 때, 오랫동안 알고 있던 조선 상인 김자평(金子平)으로부터 평양에서 서양인 2명과 중국인 2명을 봤다는 말을 들었다. 이 소식은 북경의 외교가를 뒤흔들어 놓았다.

1868년 봄, 미국은 셰넌도어호 페비거 함장을 조선에 파송해 우문태의 말이 사실인지 확인하고자 했다. 조선 측은 이에 대해 자신들은 김대청(金大靑)은 알아도 김자평은 모른다고 대답했다. 김대청은 1867년 초 슈펠트가 조선에 왔을 때, 함께 와서 장연 육도에서 우문태를 만난 적이 있었다. 조선 측은 이 김대청을 우문태에게 생존설을 말한 김대평이라고 간주하고 체포해 미국 측과 함께 심문했다. 조선 측은 김대청에게 우문태를 만난 적이 있냐고 물었고 그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우문태에게 서양인 2명과 중국인 2명의 생존설을 말했는가를 물었고, 김대청은 그런 적이 없다고 대답했다. 조선 정부는 미국 측에 우문태의 주장은 거짓이라고 말했다.

여기에 대해 미국 측은 김대청에게 언제 우문태를 만났는지 물었다. 그는 1867년 초라고 답했다. 우문태가 김자평을 만난 것은 1867년 여름이었다. 만난 날짜가 다른 것이다. 또 미국 측은 김대청에게 주소와 직업을 물었다. 그는 장연 육도에 사는 어부라고 했다. 하지만 김대평은 작도에 사는 상인이었다. 미국 측은 조선 측이 데리고 온 사람은 김자평이 아니라 김대청이라고 생각했다.

조선 측은 김대청을 희생양으로 삼았다. 황해 감사는 대원군의 명령으로 셰넌도어호가 정박해 있는 바다 앞에서 김대청을 효수해 버렸다. 이런 사건을 본 셰넌도어호 선원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페비거는 조선의 이야기를 믿을 수 없다고 보고했다.

제너럴셔먼호의 진상은 아직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하지만 당시 기록을 면밀하게 살펴본다면 우리는 좀 더 진실에 접근할 수 있다. 한미수교 140주년을 맞이해 한국 기독교는 제너럴셔먼호 사건의 실체를 밝혀 한·미 관계의 첫 단추를 바로 채우고, 한국 개신교의 시작을 바로 알려야 할 것이다.

박명수 서울신대 명예교수·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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