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일제 핍박 알린 결정적 장면

마펫한국컬렉션에서 찾은 ‘조선 독립운동 총평’이라는 제목의 1919년 3월 1일자 기록물. 찰스 베른하이젤 선교사가 쓴 글을 후대 연구자가 옮겨 썼다. 마펫한국컬렉션 캡처
 
사무엘 마펫 선교사. 국민일보DB
 
3·1운동 당시 평양의 기독교인들이 남산현교회에 모인 모습. 성도들과 시민들은 독립선언식을 연 뒤에 연대 행진을 벌였다.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1919년 3월 1일 전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시작된 독립만세운동을 당시 한반도 땅에서 보고 듣고 느낀 미국인 선교사들의 생생한 증언이 문서로 확인됐다. 국민일보는 최근 ‘마펫한국컬렉션(Moffett Korea Collection)’을 통해 104년 전 평양과 서울 등에서 들불처럼 퍼져나갔던 3·1운동 목격담을 기록한 선교사들의 관련 보고서 내용을 언론사 중 처음으로 분석했다.

마펫한국컬렉션은 미국북장로교 선교사로 한국에서 46년 동안 사역했던 사무엘 마펫(1864~1939·마포삼열) 선교사를 비롯해 당시 한국 선교사들의 선교편지와 각종 보고서, 기사 등이 수록된 선교 데이터베이스다. 이 가운데 선교사들이 쓴 ‘조선 독립운동 총평’이라는 제목의 글에는 3월 1일을 비롯해 당시 상황이 세세하게 기록돼 있다. 전문가들은 보고서 형식의 이 글들은 당시 일제의 한국 지배를 당연하게 여겼던 미국인들의 인식 변화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한다. 당시 기록을 날짜별로 정리했다.
 
1919년 3월 1일(토)

“이 나라 역사에서 기억에 남을 날이다. 고인이 된 황제(고종)의 장례식을 앞두고 한국인들 사이에 억압된 흥분이 있었다. 마펫 박사와 홀드크로프트씨, 나(베른하이젤)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직접 보기로 했다. 우리는 안뜰(평양 장대현교회 옆 숭덕학교)에 사람들이 가득 찬 걸 발견했고 3000명으로 추정했다.

내가 들어갔을 때 김선두(당시 장로교 총회장) 목사가 말씀을 전한 뒤 베드로 3장 13~17절과 로마서 9장 3절을 읽었다. 그런 뒤 정일선씨가 단에 올라 독립선언서를 읽기 시작했다. 그런 뒤 시민들이 발언했다. 이들은 주어진 지시를 따르고 당국에 저항하거나 일본인을 공격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몇몇 사람이 작은 한국 국기를 나눠줬다. 군중은 국기를 흔들고 만세를 부르며 거리로 나갔다. 30분 뒤 경찰서장은 마펫 박사에게 군중을 해산시킬 것을 요청했다. 그는 ‘해산하는 것이 지혜로울 것’이라고 말했다. 경찰관들은 갔고 우리도 그 자리를 떠났지만 군중이 우리를 따라오기 시작했다. 우리를 보자 사람들은 모두 깃발을 흔들며 만세를 외쳤다. 우리가 행렬을 이끌고 있었다. 나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고 우리 일행은 언덕 위로 올라가 서문 거리로 나온 뒤 집으로 돌아갔다. 6시쯤 제4교회(산정현교회) 강규찬 부목사가 나를 찾아왔다. 그는 내게 운동에 대한 의견을 물었고 나는 ‘비난하거나 칭찬할 수는 없지만, 한국인의 용기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찰스 베른하이젤 선교사)
 
3월 2일(주일)

“어젯밤 자정쯤 경찰서에 불려갔던 마펫 박사가 ‘오늘 예배가 허용되지 않는다’고 전했다. 강규찬 목사가 오늘 아침 6시쯤 체포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후 다른 사람들도 모두 체포됐단 걸 알았다.(중략) (마펫 박사는) 한국인들은 계속 지도자가 체포될 것이고 감옥에 더이상 공간이 없을 때까지 체포될 것이라고 말했다.” (찰스 베른하이젤 선교사)
 
3월 5일(수)

“4일 시내에 갔는데 거리에서 수천 명의 한국인들을 봤다. 가게는 모두 문을 닫았다. 여기저기서 일본 군인들을 볼 수 있었다. 한국인들은 수시로 만세를 외쳤고 군인들은 그들을 해산시키기 위해 달려들었다. 세 명의 군인이 두 명의 한국인을 단단히 묶은 뒤 밀쳤다.(중략) 다른 곳에서는 총검을 든 군인들이 사람들을 쫓고 있었다.”(사무엘 마펫 선교사)
 
3월 27일자 베이징텐진타임스 보도

“한국 학생들이 일본인 교사에게 한국어로 답하기를 고집하고 제국(일본)의 인구를 물어도 한국 인구로 대답하고 있다. 한국에 있는 일본 학교들이 문을 닫고 있다. ‘대한민국 만세’를 외친 뒤 학생들이 단체로 교문 밖으로 나가는 일도 있다”고 보도했다. 이치만 장로회신학대 교수는 28일 국민일보와 통화에서 “선교사들은 당시 3·1운동을 비롯해 4월 15일 제암리 학살사건을 본국인 미국에 즉각 알렸고 이 같은 사실이 미국 사회에 알려지면서 일제에 의한 한국 식민통치의 부당함이 확산하는 계기가 됐다. 여론이 바뀌었다”면서 “폭력을 지양하고 평화를 지향했던 3·1운동이 지닌 힘이 이처럼 컸다”고 평가했다.

장창일 기자 김나영 조승현 인턴기자 jangci@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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