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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사랑하며-김서정] 한라산을 오르며
눈 덮인 한라산에 올랐다. 눈 소식도 드물었고 날씨까지 포근해 꿈꾸던 설국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충분히 황홀한 설경이었다. 봄에 오르다 포기했던 가파른 계단 길이 눈에 덮여 만들어진 완만한 오르막은 훨씬 걷기에 수월했다. 생전 처음 아이젠 끼우고 내딛는 발밑에서는 뽀드득 빠드득 경쾌한 소리가 올라온다. 제주에 내려와 오른 한라산 두 코스, 영실과 어리목의 매력은 정상 부근이 광활한 평원이라는 점이다. 숨을 몰아쉬며 이를 악물고 무거운 다리를 끌어올리다 보면 어느 순간 거짓말처럼 눈앞이 탁 트인다. 그때부터 산행은 마치 가벼운 산책길 같다. 백록...
입력:2018-01-04 17:35:01
[살며 사랑하며-윤고은] 청첩장의 유효기간
요즘엔 종이 대신 모바일 청첩장을 돌리는 경우도 있지만, 그래도 여전히 내 서랍 하나는 청첩장 보관용으로 사용되고 있다. 몇 년 만 지나도 활자가 증발하는 영화표나 기차표에 비하면 청첩장에 박힌 활자들은 거의 영구적인 것처럼 보인다. 빳빳한 종이 재질과 선명한 인쇄 상태는 확실히 보관하기에 좋고, 청첩장 위에 놓인 문장들이 신랑신부가 고민해서 선택한 결과라는 걸 생각하면 쉽게 버릴 수도 없다. 여러모로 청첩장은 수집하기에 좋은 품목이 되어버렸다. 나도 두어 번 지인들의 청첩장을 써준 적이 있는데 쉽게 생각하면 쉽지만 정성스레 쓰자면 꽤 복잡해지...
입력:2018-01-02 18:10:01
[살며 사랑하며-김태용] 노란 개를 찾아서
올해는 무술년(戊戌年)이다. 연초가 되면 늘 그렇듯 한동안 무술년에 대한 다양한 정보와 덕담, 그리고 말장난이 이어질 것이다. 몇 마디 더 덧붙이고 싶지만 바람 빠진 풍선 같은 아재개그가 될 것 같아 넘치는 장난기를 그만두기로 한다. 독자 여러분이 상상하는 그런 게 맞다. 각설하고, 필자 역시도 무술년에 대한 정보를 검색하면서 그 뜻을 읽고 왜 요즘 노란색 상품들과 전단들, 선물포장지들이 눈에 많이 띄었는지 새삼 알게 되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무술년의 무(戊) 자는 황금색을 지칭한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재물과 복의 해라고 풀이되기도 한다. 그러나 ...
입력:2017-12-31 17:25:01
[살며 사랑하며-김서정] 우리 엄마들
‘엄마들’에 관한 일이 많은 요즈음이다. 우선은 작은이모. 소프라노 가수였던 이모는 독일 연수도 다녀오고, 오페라에도 출연하고, 합창단을 꾸려서 해외공연도 가는 등 활동이 왕성했다. 그런 이모가 기억을 잃어간다. 자식도 잘 못 알아보니 조카 알아볼 리가 없다. 인사를 하면 커다란 눈을 깜빡거리며 옅은 미소만 띤 채 빤히 쳐다본다. 며칠 전 만난 이모는 여전히 고운 얼굴이었지만 말은 더 없어졌다. 작년만 해도 드라이브하는 차 안에서 노래도 불렀는데. 그리고 누구보다 활달했던 작은엄마. 눈꺼풀의 선명한 파란색 아이섀도는 어린 내게 강렬한 ...
입력:2017-12-28 19:15:01
[살며 사랑하며-윤고은] 늙지 않는 영화들
크리스마스 연휴 동안 실시간 검색어 목록에서 ‘967달러’를 봤다. 그 구체적인 금액의 출처는 영화 ‘나 홀로 집에’였다. 주인공 케빈이 시킨 룸서비스 비용이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보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나 홀로 집에’는 1990년에 개봉했지만 지금도 이맘때면 다시 소환된다. 확실히 크리스마스는 유년의 것이어서 우리가 아직 아이였을 때 봤던 영화와 책, 노래, 당시의 어떤 기분들이 지금도 크리스마스의 기준이 된다. 어른들은 그걸 단지 재현하려고 할 뿐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며칠 후 나는 ‘해리가 ...
입력:2017-12-26 17:40:01
[살며 사랑하며-오병훈] 종이상자
연말연시가 되면서 집집마다 대문 앞에 빈 종이상자들이 쌓여 있다. 바람이 불면 길에 상자들이 흩어져 보행자들의 통행에 지장을 주게 된다. 빈 종이상자 안에는 비닐 재질의 완충재까지 들어 있다. 도시가 커지면서 생활 쓰레기 또한 커다란 문제가 되고 있다. 가정에서 나오는 생활 쓰레기도 천만 명이 사는 서울이라면 여간 큰 문제가 아니다. 개인이 버리는 쓰레기도 잘 분리하면 귀중한 자원이 된다. 먼저 택배로 보내온 종이 상자는 테이프를 뜯어낸다. 상자도 두 번 이상 사용한 것은 테이프도 여러 겹이다. 모두 뜯어내고 접으면 부피가 많이 줄어든다. 우유팩이...
입력:2017-12-24 18:10:01
[살며 사랑하며-김서정] 허기
고양이가 또 토했다. 일주일쯤 집을 비운 뒤 돌아온 참이다. 그간은 친구가 하루 한 번 들러 밥을 주고 화장실을 치워줬더랬다. 예전에도 한 번 썼지만, 어린 시절 홀로 헤매던 길고양이 출신인 맹랑이는 밥 조절을 못 한다. 있으면 있는 대로 먹고, 그러고도 먹을 것에 가리지 않고 달려든다. 그 녀석 입에는 아무 것도 닿지 않도록 신경 바짝 써서 치워둬야 한다. 그래도 어쩌다 방심한 틈에 방에 들어가 과자 포장지를 갈기갈기 찢어 꺼내는 데는 정말 못 당한다. 프라이팬 기름 닦은 키친타월은 뚜껑 튼튼한 휴지통에 즉각 버려야 한다. 이런 녀석이니 밥 하루치를 한 ...
입력:2017-12-21 17:30:01
[살며 사랑하며-윤고은] 여행의 묘미
곧 유럽 배낭여행을 간다는 학생들이 내게 소매치기 예방법을 알려달라고 했다. “옷 수선하는 집에 점퍼를 맡겨서 안주머니를 만들어달라고 해. 뭐든 지퍼 달린 안주머니가 가장 안심이야. 요즘엔 주머니가 달린 팬티도 있는 것 같던데. 지폐를 접어서 넣을 수 있는 허리띠도 애용하지. 이건 공항 검색대를 통과한 다음에 착용하길 권해. 아, 그리고 휴대폰이든 종이든 지도는 커닝하듯 살짝 보는 거야. 도심에서 대놓고 지도나 가이드북을 보면 표적이 되기 딱 좋으니까.” 그리고 나는 알고 있는 사례들을 나열했다. 캐리어를 통째로 도둑맞은 친구부터 사진 찍어...
입력:2017-12-19 18:00:02
[살며 사랑하며-오병훈] 차나무
우리나라에서 겨울에 꽃피는 나무가 더러 있다. 남쪽의 난대식물 중 동백, 비파, 목서, 구골나무 따위 상록활엽수는 찬바람이 불면 맑은 향을 퍼뜨린다. 특히 차나무는 서리가 내리기 시작하면서 꽃망울이 부풀고 첫 얼음이 얼 무렵 새하얀 꽃송이가 반쯤 벌어져 아래를 향해 매달린다. 겨울에 꽃이 피기 때문에 이듬해 여름 동안 열매가 자라고 다음해 새 꽃이 필 무렵 비로소 씨가 여문다. 그래서 꽃과 열매를 한 가지에서 볼 수 있다. 최근에는 차나무를 관상수로 가꾸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중국 원산의 애기동백을 붉은꽃차나무라 하여 소개하는 이도 나왔다. 중국에서...
입력:2017-12-17 17:25:01
[살며 사랑하며-김서정] 예순 즈음에
최근 일주일 사이에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다. 수년 전부터 수십 년 전 사이에 있었던 인연의 끈이 연속해서 이어진 것이다. 기억 저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었다는 것도 잊었던 인연들이었다. 아마 제주에 내려오지 않았다면 영영 끊어져 있었을지도 모른다. 첫 번째는 삼사 년 전 회의를 몇 번 같이 했던 선생님. 맑고 깊게 가라앉은 얼굴에 고요한 아우라가 깃들어 있어 어렵기만 했던 그 분은 뜻밖에 따뜻하고 활달하신 데가 있었다. 두 번째는 그 선생님이 매개가 되어 다시 닿은 선배작가와의 인연. 그 분께는 거의 삼십 년 전 젊은 혈기에 큰 결례를 저지른 적이 있는...
입력:2017-12-14 17:50:01
[살며 사랑하며-윤고은] 두부와 벽돌
샐러리나 파프리카를 장바구니에 담을 때의 기분은 참치 통조림이나 라면을 담을 때와는 좀 다르다. 어쩐지 좀 산뜻하고 부지런해지는 기분이랄까. 그래서 마트에 갈 때마다 여러 채소를 종류별로 담곤 한다. 엄밀히 말하면 나는 채소 자체를 좋아한다기보다 채소를 살 때 그 기분을 좋아하는 것이다. 장바구니 안에는 채소, 두부, 달걀 등 접근성과 신선도가 좋은 식재료들이 어떤 명분을 가지고 올라탄다. 그 결과 지금 우리 집 냉동실 안에는 두부 네 팩이 들어 있다. 한들한들하던 채소 몇 가지는 이미 버려진 지 오래고, 그나마 두부를 유통기한 지나기 전에 얼린 게 긴급 ...
입력:2017-12-12 17:45:01
[살며 사랑하며-오병훈] 소나무 가로수
우리의 옛 풍속에 정월달이면 한 해를 맞이하는 뜻으로 어른들께 새해 인사를 드렸다. 가까이 모시는 어른들은 직접 세배(歲拜)를 드렸으나 멀리 계신 분께는 서신으로 안부를 전했는데 수복강녕을 담은 소나무와 학 그림을 즐겨 사용했으니 바로 세화(歲畵)다. 말하자면 오늘날의 연하장과 같다. 모든 초목이 푸른 여름에는 소나무와 잣나무의 청정한 아름다움이나 가치를 모른다고 했다. 겨울이 되어 초목의 잎이 떨어진 뒤에도 송백만이 변함없으니 절개를 지키는 선비의 기상이 바로 이 나무와 같지 않은가. 소나무는 확실히 우리 겨레가 좋아했던 나무임에 틀림없다. ...
입력:2017-12-10 17:35:01
[살며 사랑하며-김서정] 요가를 하면서
놀다 다친 데에 자동차 사고로 놀란 허리와 다리를 부여잡고 애고애고 한동안 끙끙거리다 주위의 권유로 요가를 시작하게 됐다. 가만히 앉은 채 몸을 이리저리 비틀기만 하는 심심한 운동이라는 선입견이 있어서 전혀 흥미를 못 느끼던 요가를 하게 될 줄은 몰랐다. 그런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요가는 심심한 운동이 아니었다. 그건 정신없이 공을 쫓거나 시간에 쫓기는 대신 차분히 나 자신과 대결하는 운동이었다. 몸을 통해 나를 다시 꺼내 보고 정리하며 재배치할 수 있는 시간을 요가는 베풀어주고 있다. 놀랐던 건 내가 생각보다 다리가 허술하다는 점이다. 사고 후...
입력:2017-12-07 17:50:01
[살며 사랑하며-윤고은] 노각입니다
집 근처 편의점에 갔더니 사장님이 나를 향해 “택배재벌이다”라고 말했다. 얼마 전에 새 책을 출간했던지라 몇 군데 보낼 일이 있었고, 그래서 편의점 택배를 좀 이용했던 것이다. 그래봤자 열 건이 조금 넘는 발송이었는데 재벌 소리를 듣다니. 고객에게 말을 걸지 않는 ‘언택트(untact)’ 매장이 뜨고 있다던데, 여긴 분명 ‘리얼-콘택트(contact)’ 매장이다. 택배재벌이란 별명이 생겼다고 하자, L도 그 편의점 일화 몇 가지를 기억해냈다. 그러고는 “난 그런 스타일은 좀 불편한데”라고 했다. L은 비슷한 거리감으로 떨어...
입력:2017-12-05 17:45:01
[살며 사랑하며-오병훈] 지하철에서
지하철에서도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세계적인 서울 지하철이지만 승객 중에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이를 가끔 보게 된다. 에스컬레이터를 탈 때 걷는 사람은 또 왜 그렇게 많은지. 오랜 관습을 고치지 못하고 있다. 가만히 서 있으려고 해도 뒷사람이 재촉하는 바람에 걸을 수밖에 없다. 에스컬레이터는 톱니를 돌려 움직이는 시설이다. 보통 체중인 사람도 뛰면 수백 킬로그램으로 가중된다. 작은 충격에도 톱니가 부서질 수 있으므로 걷거나 뛰어서는 안 된다. 며칠 전 전철 안에서 본 일이다. 젊은 여인이 다리를 꼬고 앉아서 스마트폰 게임에 열중하고 있었다. ...
입력:2017-12-05 14:25:03
[살며 사랑하며-김서정] 백설공주의 죄
법을 가르치는 사회교육과 선생님이 재미있는 페이퍼를 보여주었다. 동화 속에서 법적으로 문제가 될 만한 점을 찾아오라는 과제를 냈더니 이런 글들이 나왔다면서. 내가 받은 것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과 ‘백설공주’ 두 편에 대한 분석이었다. 지치고 우울했던 수요일 밤, 이 어린 재판관들이 내 기운을 단박에 북돋아 주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이 이야기들이 알고 보면 범법투성이라고 지적하는 그들의 통통 튀는 목소리가 귓전에서 날아다니는 듯했다. 백설공주의 계모가 살인교사와 살인미수죄를 저질렀다는 판결이야 당연해 보인...
입력:2017-11-30 17:55:01
[살며 사랑하며-윤고은] 발통역
삿포로에서 돌아오던 비행기 안이었다. 나는 3-3 배열 좌석의 복도 쪽에 앉아 있었고, C가 가운데, 그리고 창가 쪽엔 모르는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이 “저기요” 하고 말을 걸어오기 전까진 한국인인 줄만 알았다. 그녀는 세관신고서를 보여주며 좀 설명해줄 수 있느냐고 했다. 일본인이고 한국말을 조금 할 줄 아는데, 이 서류의 말들이 어렵다면서 말이다. 이미 반쯤 썼고 몇 부분만 하면 된다는 거였다. 세관에 신고할 만한 게 있는지를 표시하는 항목들이었다. 나는 ‘없음’ 표시를 가리키면서 “여기에 다 체크하면 돼요”라고 말했는데, 말...
입력:2017-11-28 17:40:01
[살며 사랑하며-오병훈] 은행나무
잡지사 사무실은 늘 손님이 많다. 오랜만에 찾아간 터라 인사를 나누고 자리에 앉으려는데 젊은 여직원이 “누군가 화장실에 갔다 왔나 봐요.” 그 말을 들으니 내 신발부터 먼저 보게 된다. 잠시 후 다른 손님 두어 분이 들어왔다. 확실히 냄새가 나는 것 같다. 그제야 건물 입구에 떨어져 있던 많은 은행 열매가 생각났다. 간밤에 비가 내리고 세찬 바람까지 불었던 관계로 사람들이 밟고 지났으리라. 공자가 은행나무 아래서 제자들을 가르쳤던 곳을 행단(杏壇)이라 하였다. 중국 곡부의 대성전에는 은행, 회화, 측백나무가 있다. 우리나라 문묘에도 600살 된 ...
입력:2017-11-26 17:30:01
[살며 사랑하며-김서정] 한밤중 아무도 몰래
아주 사랑스러운 그림책을 보았다. ‘한밤중에 아무도 몰래.’ 조그만 여자 아이 하나가 한밤중에 문득 눈을 뜬다. 같은 방의 언니는 아무리 흔들어도 안 일어나고 엄마 아빠도 쿨쿨 자고 있다. 아이는 할 수 없이 혼자 화장실에 간다. 그런 뒤 부엌으로 가서는 냉장고를 열어 고양이에게 우유를 주고 체리를 살짝 꺼내 먹는데, ‘야단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나는 이 대목이 정말 좋다! 할짝할짝 우유를 핥는 고양이 앞에 쪼그리고 앉아 아이가 바야흐로 커다랗고 빨간 체리를 막 입안으로 집어넣으려는 장면에 가슴이 뭉클해진다. 한밤중이지만 ...
입력:2017-11-23 18:50:01
[살며 사랑하며-윤고은] 제철의 아름다움
매번 마지막인 것처럼 무화과를 먹고 있다. 이맘때 무화과를 생과로 먹으려면 그럴 수밖에 없다. 무화과는 8월부터 11월까지 즐길 수 있는 과일이고, 거짓말처럼 겨울이 되면 사라져서 다음 해 초여름까지는 보이지도 않으니 말이다. 무화과 킬러인 나에게 네 달은 너무 짧다. 벌써 11월 말이니, 요즘에는 보일 때마다 두 상자씩 쟁여두게 된다. 이번 판이 마지막일지도 몰라, 초조해하면서. “그거 술안주로 좋지.” 하면서도 C는 내가 왜 그리 다급하게 무화과를 먹어대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나중에서야 우리가 전혀 다른 무화과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입력:2017-11-21 17:35:01
[살며 사랑하며-오병훈] 모과
잡지사 문을 들어서는데 향긋한 과일 냄새가 내게로 와 포근히 안겼다. 남창으로 새어드는 한 가닥 햇살이 작은 소쿠리의 모과를 비추고 있었다. 실내를 가득 채운 농익은 모과향, 확실히 모과는 눈으로 먹는 과일이다. 크기는 다른 어떤 과일에도 뒤지지 않을 만큼 푸짐하지만 시고 껍질이 단단해서 먹기는 곤란하다. 그래서 모과차나 모과청으로 가공하여 향기와 맛을 취할 뿐이다. 나무에서 달리는 참외라 하여 목과(木瓜)라 한 것을 우리말로 모과라 했다. ‘과일전 망신은 모과가 다 시킨다’는 말이 있다. 못생겼고 실속이 없는 과일이라는 뜻일 게다. 재래종 ...
입력:2017-11-19 17:45:01
[살며 사랑하며-김서정] 부러진 오른손
과학 글을 쓰는 동료작가 하나가 지난겨울 오른 손목이 부러지는 사고를 당했다. 아픈 건 말도 못하고, 깁스생활에 불편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글도 못 쓰고, 운전도 못 하고, 화장실 뒤처리도 너무 힘들고… 깁스 푼 뒤에도 기나긴 재활치료. 그런데 심각한 재앙인 상황을 이 친구는 신묘하게 뒤집어버렸다. 왼손으로 그림을 그린 것이다. 원래 그림을 잘 그려 자기 글에 직접 일러스트를 하던 터였다. 그는 하루에 한 가지씩 동물을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단순히 왼손에 일을 시키면 어떻게 될까 실험정신이었지만, 그림 실력은 일취월장했고 덧붙인 해설 글도 너...
입력:2017-11-16 18:15:01
[살며 사랑하며-윤고은] 몸을 입은 옷
우산을 챙겨 나간 날은 펼쳐볼 일도 없더니, 일기예보를 간과하고 나간 날은 꼭 비가 온다. 그 결과가 비닐우산 몇 개로 남아 있다. 네댓 개가 뽀송뽀송한 채 대기 중인데도, 밖에서 비를 만날 때는 또 우산이 없는 것이다. 며칠 전에도 그랬다. 버스 차창에 빗방울이 맺히는 걸 보고서야 아침의 일기예보를 떠올렸다. 오후부터 비가 온다는 걸 알고도 우산 챙기는 걸 놓친 거였다. 내 한 몸이면 좀 더 초연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문제는 늘 내 몸이 동반한 것들이었다. 일단 물에 닿지 않아야 할 귀고리와 목걸이부터 빼기 시작했다. 그것들을 휴지에 감싸 가방 안쪽 주...
입력:2017-11-14 17:50:01
[살며 사랑하며-오병훈] 홍시와 곶감
서점가 골목 식당으로 들어서는 순간 잘 익은 감 가지가 눈길을 끌었다. 여러 개의 탐스러운 감이 달린 가지에서 짙은 가을을 느낄 수 있다니.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상경하는 열차에서 감이 달린 가지를 흔히 볼 수 있었다. 시골에서 돌아올 때면 으레 감 가지를 꺾어와 벽에 걸어두고 말랑말랑한 홍시가 되면 하나씩 따먹으며 향수를 달랬다. 오랜만에 도심에서 감이 달린 가지를 볼 줄이야. 누렇게 익은 감 사이에서 터질까 가슴 조이며 딴 홍시의 맛을 어떤 과일에 비길 수 있으랴. 반으로 갈라 과육을 들이키면 입에 가득 달콤한 향기가 감돈다. 단맛을 삼켜도 딱딱한 씨가 ...
입력:2017-11-12 18:25:01
[살며 사랑하며-김서정] 11월의 숲
몸이 녹작지근하고 날은 꾸무럭하다. 억새는 바람 속에 햇살 담뿍 받으며 춤추는 걸 보아야 제격이니, 이런 날은 숲에 가는 게 더 낫다. 집 근처 한라생태숲으로 향한다. 휠체어도 다닐 수 있도록 매끈하게 닦인 산책길 뒤쪽으로는 무성한 나무들 사이로 사그락사그락 낙엽을 밟으며 걸을 수 있는 오솔길도 있다. 나는 구불구불 오솔길로 들어선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조금은 붉게 조금은 노랗게 단풍이 들어 있다. 벌거벗은 가지들도 제법 많다. 저 안쪽 내 눈높이 아래 가녀린 나뭇가지 사이에 손바닥만 한 새둥지가 보인다. 여름에는 무성한 푸른 잎이 꼭꼭 감추어 주었겠...
입력:2017-11-09 17:3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