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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사랑하며-하주원] 불편한 구두
인턴을 시작하면서 운동화를 신을 수 없으니 구두는 신어야 했는데 그래도 편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난다. 겉에서 보기에는 아주 편해 보이는 신발은 싫어서 굽이 낮은 정장 구두를 샀다. 하루 18시간의 근무를 같이 해주던 구두였다. 해결되지 않는 문제는 책이며 논문을 찾아보고 그렇게 나 혼자 치열한 줄 알았던, 사실 딱히 다른 사람들과 비교를 해서 그런 결론을 낸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청춘을 불태웠던 때 함께한 구두였다. 가격은 점점 올랐지만 그래도 좋은 구두는 좋은 곳으로 데려다준다는 말에 늘 같은 브랜드 구두만 사서 닳을 때까지 신었다. ...
입력:2018-05-16 05:05:04
[살며 사랑하며-황시운] 세상을 달리는 아이
첫 조카가 태어나던 날엔 그해 마지막 눈이 내렸다. 여린 입술을 달싹이는 아이의 발간 얼굴을 처음 본 순간, 나는 모든 것이 완벽하다고 느꼈다. 아이는 봄날의 푸성귀처럼 무럭무럭 자라 작년 봄, 드디어 초등학생이 되었다. 아이의 모든 처음이 그러했듯, 가족들은 아이의 학교생활에 온 신경을 기울였다. “급식 먹고 나면 혼자 운동장에 나가서 뛰어다닌대요.” 올케가 걱정스레 말했다. 새 학년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올케의 말에 나도 덩달아 심각해졌다. 자꾸만 텅 빈 운동장에 혼자 서 있는 아이의 모습이 연상됐다. 왕따니 학폭이니...
입력:2018-05-11 05:10:02
[살며 사랑하며-하주원] ‘End Game’
남북 정상회담이 있던 날 실시간 뉴스는 놓치고 지하철에 앉아 뒤늦게 동영상으로 봤다. 영화 같은 장면에 그만 눈물이 났는데, 내 스마트폰을 위에서 같이 보셨는지 아직도 정치쇼에 속고 있느냐며 핀잔을 들었다. 그런 말을 들으니 괜히 희망을 가지나 싶었다. 지금보다 남북관계가 소원했던 1980년대에도 통일 또는 교류에 대한 기대는 계속 있었다. 금세 통일이 이루어질 것 같은 희망을 갖다가 기대 접기를 반복했다. 물론 통일은 ‘어벤저스3’에서 닥터 스트레인지가 말한 1400만605분의 1처럼 희박한 미래일 수 있다. 그 장면의 “We’re in the end game now”...
입력:2018-05-09 05:05:05
[살며 사랑하며-황시운] 무례한 선의
일주일에 두 번, 인근 대학병원으로 재활치료를 받으러 다닌다. 병원에 갈 때마다 나는 재활의학과의 진료대기실 대신 재활치료실 옆 카페테리아에서 치료 순서를 기다리곤 한다. 침대에 실린 채 치료를 받으러 내려오는 초기 환자들이 많은 대학병원의 특성상 진료실과 치료실 주변은 늘 혼잡하기 때문이다. 그날도 접수를 마치고 카페테리아로 갔다. 한쪽에 자리를 잡고 휠체어의 브레이크를 잠그는데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아이고, 젊은 사람이 어쩌다 그랬대” 질문인지 탄식인지 모를 말을 건넨 이는 고운 인상의 노부인이었다. 한껏 찌푸린 그의 미간에서 ...
입력:2018-05-04 05:05:04
[살며 사랑하며-하주원] 워킹맘이 골목상권 지키려니
봄은 왔으나 장사는 잘 되지 않는다는 소상공인들의 한숨 소리가 크다. 대형마트와 쇼핑몰이 들어서고 프랜차이즈가 늘면서 영세한 자영업자들의 폐업은 늘었다는 소식을 듣고 안타까운 마음에 골목상권, 동네상점 살리기를 꼭 실천하겠다고 결심했다. 퇴근 후 한 정거장 먼저 내려 동네 슈퍼마켓에 들렀다. 매번 사는 것은 가격을 외우고 있으니 개당 가격이 더 비싸다는 것을 깨닫는다. 자주 먹지도 않는 아스파라거스, 마늘소금, 칵테일 새우가 없다고 괜히 아쉽다. 힘들게 장을 봐서 한 정거장 넘게 들고 가는 게 여간 무겁지 않다. 매일 신선한 제품을 조금씩 장 보면 가장...
입력:2018-05-02 05:05:03
[살며 사랑하며-김태용] 평양냉면 주세요
어릴 적 부모님을 따라 평양냉면을 먹었을지도 모른다. 어렴풋하게 남대문 시장에 있는 식당에 가 아버지와 어머니가 만두는 이 집이 최고야라고 했던 말을 들었던 것도 같은데 평양냉면에 대한 기억은 뚜렷하지 않다. 음식을 지독하게 거부했던 유년시절의 입맛을 떠올리면 아마 밍밍하고 심심한 맛에 한 젓가락도 채 먹지 않았을 것이다. 서른이 넘어서야 평양냉면을 제대로 먹었고, 점점 그 맛에 빠져들어 평양냉면집을 찾아다니게 되었다. 지금은 다양한 평양냉면집의 미묘하게 다른 맛을 구분할 수 있을 정도이고, 가장 선호하는 집을 물어보면 서슴없이 대답할 수도 있...
입력:2018-04-30 05:10:02
[살며 사랑하며-김서정] 여왕과 앨리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나를 아동문학으로 이끈 결정적 계기 중의 하나다. 문학이란 말을 가지고 노는 일, 기발한 상상력과 통쾌한 풍자로 인간과 삶의 여러 국면을 다이내믹하게 파헤쳐 보여주는 일이라는 인식도 덕분에 갖게 됐다. 이 책에는 유명한 캐릭터들이 여럿 나오는데, 그중에 하트의 여왕이 있다. 매사에 화를 버럭버럭 내며 사형 선고를 내리는 카드 여왕. 요즘 어이없는 갑질로 유명해진 재벌 총수 집안의 여자들을 보니 그 여왕이 떠오른다. 걸핏하면 “저들의 목을 쳐라”를 외치는 하트 여왕은 급기야 앨리스를 향해서도 “저 애의 ...
입력:2018-04-27 05:05:04
[살며 사랑하며-윤고은] 샛길의 발견
어릴 때 동생은 달리기하듯 피아노를 연주했다. 특히 ‘고양이춤’을 최대한 빠르게 혹은 눈 감고 연주하는 걸 좋아했다. ‘스피드’가 기준이 되다보니 연주하는 모양새는 여간 경망스러운 게 아니었지만 그 덕에 웃음 유발 효과가 좀 있었다. 우리가 아이였을 때 그런 접근은 ‘장난’으로 여겨졌다. 정답은 바이엘과 체르니와 소나타로 올라가며 고루고루 여러 곡을 연습하는 쪽에 있는 것처럼 통했고, 나는 그대로 했다. 30년이 지난 지금 나는 악보 없이는 어떤 곡도 연주할 수가 없다. 악보가 있기만 하면 연주가 가능하다는 뜻도 아...
입력:2018-04-25 05:10:02
[살며 사랑하며-김서정] 안녕하세요
그림책만 내는 1인 출판사가 하나 있다. 이름에 공작소가 들어 있어 발행인은 공작소장으로 불린다. 나는 이렇게 일 많이 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편집에 밤새우기 일쑤고, 전국 서점과의 직거래 업무도 직접 한다. 그 와중에 필사적으로 퇴근해서 워킹맘인 아내와 함께 집안일에도 지극정성이다. 수준급 요리와 청소와 빨래는 물론이고 딸 바지 무릎을 예쁜 아플리케로 꾸미는 초인적인 살림솜씨! 그런 걸 어떻게 아느냐면, SNS에 종종 맛깔나는 입담과 사진으로 올라오기 때문이다. 수십 개씩 달리는 댓글에 일일이 감사를 표하며 답을 하는 일도 그는 빼놓지 않는다. 모...
입력:2018-04-20 05:10:02
[살며 사랑하며-윤고은] 촌스럽게 왜 이래
“게시판에 안내해드린 바와 같이 오늘은 우리 아파트 주차장 물청소를….” 안내방송이 시작됐는데 뭔가가 좀 낯설었다. 목소리가 달라졌다. 여자 목소리이긴 했으나 엄밀히 말하면 여자 기계의 소리였다. 어떤 시스템에 내용을 입력하면 저렇게 방송되는 모양인데, 아나운서처럼 속도도 일관되고 발음도 정확했지만 ‘화법’이 실종됐다. 단어들이 찰진 말이 되어 전달되는 게 아니라 회전초밥 레일 위의 접시들처럼 그저 흘러가고만 있었다. 나는 여전히 관리사무소에서 누군가가 전달사항을 읽는 방송에 익숙한 것이다. 음음, 하면서 목을...
입력:2018-04-18 05:10:02
[살며 사랑하며-김태용] 그날 바다 이후
2014년 4월 16일 이후, 우리들의 삶이 달라졌다. 많은 사람들이 같은 곳을 바라보게 되었고, 말을 잃기도 했다. 입술이 벌어졌지만 새어나오는 것은 언어로 기록하기 힘든 소리들이었다. 소리들을 짓밟는 음모와 폭력의 말들이 사람들의 목을 조이고, 분노하게 만들었다. 소리들은 조각나고 흩어지기도 했다. 때로는 어떤 단어와 말들은 사용하는데 주저하게 되었고, 우리가 믿어 왔던 언어를 의심하는 동시에 또 다른 언어의 힘을 믿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모았다. 목소리와 목소리 사이사이 스며들어 출렁이게 만드는 뜨거운 무언가가 우리를 움직이게 했다. 사람들이 있었...
입력:2018-04-16 05:05:03
[살며 사랑하며-김서정] 진짜 축제
제주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는 유채꽃 축제가 열렸다. 거의 10㎞ 길 양옆으로 뻗어나가는 유채꽃, 그 뒤로 분홍 베일 드리우는 듯한 벚꽃. 작년에 본 그 황홀한 절경이 눈앞에 아른거려 올해도 개막날 나섰다. 난타에 무용에 안성 바우덕이 풍물단 공연까지, 흥겨운 구경거리도 많아 보였다. 그런데, 날씨가 궂다. 흐리고 찬바람 쌩 분다. 가는 길에 희끗한 게 날려 벚꽃잎이려니 했는데, 아니, 아니다. 눈이다! 심지어 차를 대고 행사장 쪽으로 걷는 도중에는, 이게 뭐냐, 우박이다! 사람들이 으아 비명을 지르며 주차장 쪽으로 우르르 뛰어 내려오는데, 강물을 거슬러 올라...
입력:2018-04-13 05:05:03
[살며 사랑하며-윤고은] 이력 보기
‘야생의 땅:듀랑고’는 공룡이 살던 원시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모바일 게임이다. 자급자족하며 생존하는 게 일이다보니 물건이 귀하다. 가끔 ‘워프’를 통해 현대에서 온 물건들이 발견되기도 하는데(‘지폐’의 쓰임새는 모닥불 정도에 그친다) 물건이 넘쳐나는 시대가 아니다보니 하나하나 그 쓰임새와 이력에 대해 비로소 들여다보게 된다. 이 게임이 가진 흥미로운 기능 ‘이력 보기’도 그래서 납득이 간다. 어떤 사물에 대한 이력을 터치 한 번으로 소환할 수 있는데, 이를테면 A님이 수리했습니다, A님이 포장했습니다, A님이 ...
입력:2018-04-11 05:10:01
[살며 사랑하며-김태용] 파란빛을 만드는 사람들
매주 칼럼을 쓰다 보니 일상과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좀 더 호기심을 갖고 들여다보게 됐다. 무심코 지나쳤던 주변을 관찰하고, 미처 몰랐던 것들이 보이기도 하는 요즘이다. 지난 2일이 ‘세계 자폐증 인식의 날’이라는 것도 신문 기사를 통해 처음 알게 됐다. 자폐증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인권 보호를 위해 2007년 유엔총회에서 지정된 이후 2010년부터 ‘파란빛을 밝혀요! Light It Up Blue!’라는 행사가 전 세계적으로 펼쳐지고 있다. 유명한 건물과 관광지는 물론 개인적 삶의 공간에 블루라이트를 켜거나 파란 옷과 파란 소품들로 이날을 ...
입력:2018-04-09 05:05:02
[살며 사랑하며-김서정] 화끈한 이웃
새 동네 이웃들이 꽤나 화끈하다. 이사 며칠 뒤 카스텔라를 사 들고 동네 커뮤니티 총무 역할을 한다는 집으로 머뭇머뭇 찾아갔더니, 당장에 차 모임이 소집되었다. 순식간에 모인 예닐곱 이웃들은 나이 상관없이 ‘님’자 안 붙이고 닉네임을 부르는 사이였다. 나도 엉겁결에 닉네임을 하나 꺼내놓아야 했다. 신입 환영 브런치하자. 그러자. 언제? 내일. 그러자. 그래서 식사 모임도 바로 다음 날 재까닥 해치워졌다. 신입은 회비도 면제였다. 주로 초등학교 교사 출신인 멤버들은 10여년 전 함께 땅을 장만하고 집을 지은, 동네 창설자들이다. 남의 집 현관도 ...
입력:2018-04-06 05:10:02
[살며 사랑하며-윤고은] 봄꽃은 예외
서랍 하나면 충분하던 시절도 있었을 것이다. 가진 것이 적고 맡은 영역은 아직 좁았던 시절. 삶이 지속될수록 한 사람의 영역이 늘어나서 이제는 정리, 정돈, 수납, 보관 같은 말이 과제처럼 다가온다. 어떤 물건이 이 집에 이 방에 혹은 이 휴대폰 안에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는데 그걸 막상 찾아낼 수는 없는, 그런 순간들이 종종 생겨나는 것이다. 물건을 소유하는 대신 사진으로 찍어 보관하는 것도 미니멀 라이프의 한 방법이라고 하던데, 그 방법도 잘 소화하지 못하면 짐스러워질 것만 같다. 디지털 시대의 사진이야말로 정리와 보관이 필수적인데, 지금 나는 사진 ...
입력:2018-04-04 05:05:04
[살며 사랑하며-김태용] 우리를 갈라놓는 것들
서울 토박이인 내가 주기적으로 찾는 곳은 제주다. 제주의 모든 계절과 자연의 흐름에 빠져 삶의 고단함이나 피로감이 쌓일 때면 제주로 가서 살까 하는 말풍선 같은 생각을 하곤 한다. 제주에 살고 있는 지인들로부터 낭만적인 생각으로 내려오면 안 된다는 말을 몇 번이나 들어 잘 알고 있지만 제주의 자기장이 나를 주기적으로 끌어당기고 있다. 작년 4월, 심신이 지치고 의욕이 없을 때 제주로 떠나 무작정 돌아다닌 적이 있다. 동이 틀 무렵 함덕 서우봉을 혼자 올라가면서 철지난 유행가들을 부르다 맞닥뜨린 작은 봉분들과 언덕 위 무덤들, 그리고 그 사이 사이 피어 ...
입력:2018-04-02 05:05:04
[살며 사랑하며-김서정] 가드를 올리고
일주일에 한 번 모여 그림책을 읽는 모임이 있다. 예닐곱에서 한두 명 안 오기도 하고 더 오기도 하면서 참석하는 사람들이 한두 권씩 가져온 그림책을 읽어준다. 그냥 읽어주기만 할 뿐, 감상 발표나 토론은 의무가 아니다. 재밌네, 예쁘네로 끝나고 넘어가는 책이 있는가 하면 의견이 분분한 책도 있다. ‘가드를 올리고’가 그런 책이었다. 이 책은 시종 싸우는 두 권투선수 모습만 보여준다. 굵은 목탄선이 다이내믹한데, 전체 흑백 톤에 유일하게 한 선수의 글러브만 빨갛다. 눈길을 강렬하게 잡아끄는 이 빨간 글러브의 선수는, 그러나 유효타 한 번을 못 ...
입력:2018-03-30 05:05:03
[살며 사랑하며-윤고은] 상상력은 위대하다
저녁 일곱 시 이후로 안 먹으려고 했는데 그만 먹고 말았네. 내 말에 M이 눈을 반짝거리며 물었다. “뭘 먹었는데?” 시카고피자를 먹었는데 도우가 좀 특이하더라고, 도우까지 다 먹게 되던데. 치즈도 좋은 거 쓴대. 별로 느끼하지도 않고. 먹는 시늉만 하려고 했는데 그게 되나. 제일 열심히 먹은 1인이야 내가. M은 내 말에 몰입하는 것처럼 보였다. 당장 그를 찾아갈 사람처럼 구체적인 질문을 던지면서 말이다. M은 다이어트 중이었는데 이런 질문들이 마음을 달래는 데 도움이 된다고 했다. “사람들한테 어제 뭐 먹었는지 물어본다니까. 맛있었는지 어...
입력:2018-03-28 05:05:02
[살며 사랑하며-김태용] 제목으로 말해요
학생으로 만나 후배가 된 두 명의 소설가와 함께 식사를 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두 친구 모두 첫 소설책을 준비 중이었고, 한 친구의 가방에는 곧 출간될 교정 원고가 있었다. 한 친구는 M, 다른 친구는 Y라고 하자. “제목은 정했어?”라고 묻자 Y가 봉투 속에 들어 있는 원고를 꺼내 보이며 멋쩍게 미소를 지었다. Y가 문학적 고집을 부리며 지은 제목은 ‘사살 없음’이었고, 나도 모르게 ‘확인 사살’이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이어서 말장난이 반복되다가 ‘감상소설’로 의견이 모아졌다. 전혀 감상적이지 않은 Y의 소설...
입력:2018-03-26 09:08:48
[살며 사랑하며-윤고은] 꽃이 된 사람
유통기한이 지난 것처럼 보이는데도 여전히 통용되는 것, 그중에 하나가 가족 간의 호칭인 것 같다. 특히 결혼으로 규모가 확장될 때 가족관계에 붙는 호칭 대부분이 가부장적이어서 적어도 내 대(代)에서 끊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 고민을 하게 만드는 것이다. 단어의 뜻을 들여다보면 차마 부르기 꺼려지는 호칭들이 있고, ‘댁’이나 ‘님’처럼 한쪽에는 있고 다른 한쪽에는 없는 존칭으로 차별적인 구도를 유발하는 것도 있다. 그러다보니 내 친구 하나는 ‘도련님’이라고 부르는 대상이 자신을 ‘형수’라고 부르는지 ‘...
입력:2018-03-21 05:05:04
[살며 사랑하며-김태용] 앉아서 움직이기, 생각하기
어릴 적 다리를 다친 이모가 목발을 짚고 걸어가는 모습이 신기하고, 아름답기까지 해서 몰래 그 걸음을 흉내 내다가 어른들한테 들켜 혼난 적이 있다. 시간이 흘러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었을 때는 한 친구와 함께 휠체어를 만들어보겠다고 나무의자와 버려진 자전거 바퀴를 달아보려고 한 적도 있다. 마음대로 되지 않아 포기하고 어설픈 바퀴의자를 버려두고 어스름한 저녁 집으로 돌아갔다. 막연하게 글을 써야지 하고 생각하던 시절 처음 쓴 습작 소설은 휠체어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는 여자가 주인공으로 등장했었다.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의 움직임을 관찰하는 것이 습...
입력:2018-03-19 05:10:01
[살며 사랑하며-김서정] 아기펭귄처럼
이사를 했다. 공동주택 단지를 벗어나 산 중턱 단독주택으로. 아파트 아닌 곳에서 사는 건 삼십 년 만이다. 위아래 옆 사방으로 나를 에워싼, 내 집과 똑같이 생긴 집들에서 똑 떨어져 나온 첫날, 막막했다. ‘쩌저적’이라는 그림책에 나오는 아기펭귄처럼. 아기펭귄 한 마리가 올라선 얼음에 쩌저적! 금이 간다. 그러고는 똑 떨어져 나간다. 아기펭귄과 똑같이 생긴 수많은 펭귄이 모여 있는 빙산이 멀어져 간다. 망망대해에서 혼자가 된 아기펭귄은 놀란 나머지 물고 있던 물고기도 떨어뜨린다. 눈이 뭉개질 정도로 울어댄다. 그러다 발치에서 어른거리는 오묘...
입력:2018-03-16 05:10:01
[살며 사랑하며-김태용] 봄이 오면 산에 들에
며칠 전부터 입에 달라붙은 멜로디가 있다. 바로 ‘봄이 오면 산에 들에 진달래 피네∼’라고 시작하는 노래다. 여전히 한겨울 내내 걸치고 있던 옷들을 입고 다니곤 하지만 낮에 거리를 걷거나 실내로 들어오는 햇볕 속에 있으면 봄이 오고 있다는 것에 새삼 놀라게 된다. 새 학기가 시작돼 다소 분주하고 이런저런 일들로 마음의 여유가 없는 가운데 나의 이성과 지각과 달리 몸이 먼저 봄을 찾고 맞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감정의 높낮이 없이, 입 모양의 큰 변화 없이 새어나오는 봄의 멜로디가 유년의 어떤 기억 속으로 나를 데리고 간다. 경기도에 ...
입력:2018-03-11 17:55:01
[살며 사랑하며-김서정] 떨치고 일어나는 사람들
함께 동화 쓰는 동지들의 모임이 있었다. 비가 부슬부슬 오는 저녁이었다. 밥은 맛있었고, 술기운이 아니어도 대화는 왁자했다. 60대부터 30대까지 연령도 성별도 다양한 우리가 그날 특히 신나서 몰두한 소재는, 초등학교(일부는 국민학교) 시절로 되돌아간 듯 귀신 이야기였다. 놀랍게도 거의 대부분 귀신 체험이 있었다. 도깨비불, 가위눌림, 귀신 목격, 그림자 습격, 소리와 냄새와 촉감 체험 등등. 어린 시절 그 일이 얼마나 공포스러웠는지에 대한 토로는, 자라서 그 공포를 어떻게 극복했는지로 이어졌다. 종교적 방식으로, 과학적 납득으로, 건강 회복으로 등등. ...
입력:2018-03-08 17:5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