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윤고은] 노각입니다



집 근처 편의점에 갔더니 사장님이 나를 향해 “택배재벌이다”라고 말했다. 얼마 전에 새 책을 출간했던지라 몇 군데 보낼 일이 있었고, 그래서 편의점 택배를 좀 이용했던 것이다. 그래봤자 열 건이 조금 넘는 발송이었는데 재벌 소리를 듣다니. 고객에게 말을 걸지 않는 ‘언택트(untact)’ 매장이 뜨고 있다던데, 여긴 분명 ‘리얼-콘택트(contact)’ 매장이다. 택배재벌이란 별명이 생겼다고 하자, L도 그 편의점 일화 몇 가지를 기억해냈다. 그러고는 “난 그런 스타일은 좀 불편한데”라고 했다. L은 비슷한 거리감으로 떨어져 있는 다른 편의점을 더 선호한다. 그곳은 정말 ‘언택트’ 매장이다.

한때는 나도 판매직원이 말을 걸거나 지켜보는 걸 불편해했는데, 최근에는 좀 달라진 내 태도를 느끼고 있다. 아무래도 온라인쇼핑의 영향인 것 같다. 온라인쇼핑을 주로 하다 보니 어쩌다 오프라인 매장에 가는 경우 직원과 대화를 하게 되는 것이다. 전문가의 육성으로 요약된 정보들을 신뢰하기도 하고, 쇼핑과 관련된 정보가 아니더라도 소설 창작에 좋은 영감을 주는 경우가 더러 있기 때문이다. 미용실, 택시, 구두수선집, 꽃집, 빵집…. 어디에서나 나는 대화할 준비가 돼 있다. 그래서 시장을 좋아한다. 사고파는 행위 이상의 무언가가 느껴지는 곳이기 때문이다. 시장에 다녀오면 늘 이야깃거리가 남는다. 지난여름 L과 내가 어느 채소가게에서 생애 처음으로 꽈리고추를 사던 날도 그랬다. 이미 우리의 대화를 통해 요리 초보임을 간파한 가게주인이 꽈리고추를 이용한 요리법 몇 가지를 읊기 시작했고, 우리는 착실한 아이들처럼 조언을 가슴에 새겼다. 시장엔 이런 맛이 있다. 바코드로는 읽어낼 수 없는 어떤 활기랄까. 우리는 마지막까지 어설픈 티를 팍팍 내고 갔는데, L이 매대 위를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어, 빵도 있네.” L이 바게트로 착각한 그것이 분명 채소라는 걸 나도 알아차렸지만, 가게주인이 나보다 먼저 그 착오에 개입했다. 어떤 사명감을 담은 어조로. “노각입니다.”

글=윤고은(소설가), 삽화=전진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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