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오병훈] 홍시와 곶감



서점가 골목 식당으로 들어서는 순간 잘 익은 감 가지가 눈길을 끌었다. 여러 개의 탐스러운 감이 달린 가지에서 짙은 가을을 느낄 수 있다니.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상경하는 열차에서 감이 달린 가지를 흔히 볼 수 있었다. 시골에서 돌아올 때면 으레 감 가지를 꺾어와 벽에 걸어두고 말랑말랑한 홍시가 되면 하나씩 따먹으며 향수를 달랬다. 오랜만에 도심에서 감이 달린 가지를 볼 줄이야. 누렇게 익은 감 사이에서 터질까 가슴 조이며 딴 홍시의 맛을 어떤 과일에 비길 수 있으랴. 반으로 갈라 과육을 들이키면 입에 가득 달콤한 향기가 감돈다. 단맛을 삼켜도 딱딱한 씨가 남게 마련이다. 이것도 그냥 뱉어버리기에는 아깝다. 살점이 붙은 씨를 혀끝으로 살살 굴리면서 쫄깃쫄깃한 과육을 빨아먹는 그 짜릿한 맛은 홍시 먹기에 익숙한 사람만이 안다.

우리 겨레는 감에 여러 이름을 붙여 주었다. 덜 익은 것은 풋감 또는 청시(靑 ), 떫은 감을 땡감, 물에 삭혀 떫은맛을 뺀 침시, 말랑말랑한 단맛의 홍시 또는 연시, 껍질을 깎아 말린 것을 곶감 또는 건시라 하고 분이 안 난 것이 반건시다. 잘 말린 곶감은 말랑말랑하면서도 반투명한 살빛이어야 한다. 겉에 내린 시상( 霜)이 시설( 雪)로 바뀌면서 단맛을 숙성시킨다. 독에 저장했다가 이듬해 봄에 꺼내면 당분이 겉으로 드러나 떡가루처럼 덕지덕지 피어있는데 혀끝을 대면 솜사탕처럼 사르르 녹는다. 이슬처럼 사라지고 마는 감미로운 맛.

정원수 가운데 감나무만한 나무가 또 있을까. 뜰에 가꾸려면 알이 작고 많이 달리는 돌감나무를 심는 것이 더 좋다. 가지가 찢어질 것처럼 많이 달리기 때문에 잎이 없는 겨울에도 꽃처럼 아름답다. 수많은 산새들이 열매를 먹기 위해 찾아오니 새를 조롱에 가두어 기를 필요가 없다. 감나무가 입으로 맛을 느끼는 과일나무라면 돌감나무는 눈으로 감상하는 선비의 나무다. 잎을 떨어뜨린 감나무 아래서 쳐다보면 조선의 하늘이 열린다. 먹지 않고도 배부른 만추의 서정을 내 뜰에 앉아서 느낄 수 있다면 얼마나 통쾌하겠는가.

글=오병훈(수필가), 삽화=공희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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