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김서정] 한라산을 오르며



눈 덮인 한라산에 올랐다. 눈 소식도 드물었고 날씨까지 포근해 꿈꾸던 설국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충분히 황홀한 설경이었다. 봄에 오르다 포기했던 가파른 계단 길이 눈에 덮여 만들어진 완만한 오르막은 훨씬 걷기에 수월했다. 생전 처음 아이젠 끼우고 내딛는 발밑에서는 뽀드득 빠드득 경쾌한 소리가 올라온다.

제주에 내려와 오른 한라산 두 코스, 영실과 어리목의 매력은 정상 부근이 광활한 평원이라는 점이다. 숨을 몰아쉬며 이를 악물고 무거운 다리를 끌어올리다 보면 어느 순간 거짓말처럼 눈앞이 탁 트인다. 그때부터 산행은 마치 가벼운 산책길 같다. 백록담 쪽은 등반통제 구간이니 거기서 더 올라야 한다는 부담도 없다. 뾰족한 정상까지 올라 정복의 자랑을 소리 높여 외치는 대신 웅장한 분화구 벽을 경이와 감탄으로 잠잠히 올려다보며 거니는 시간. 다른 산행에서는 얻을 수 없는 각별한 느낌, 평화와 여유 같은 것이 몸 안에 퍼진다.

윗세오름대피소에 바글대던 사람들이 갑자기 웅성거린다. 직원들 파업으로 즉석라면을 팔지 않는다는 뉴스가 있었는데, 어쩐 일인지 잠시 후 판매를 시작한단다. 삽시간에 긴 줄이 생긴다. 무너진 라면 기대에 하늘이 무너지는 표정으로 발을 질질 끌던 젊은 동행들이 희희낙락하며 줄에 섞여 들어간다. 샌드위치와 라면으로 두둑해진 배를 안고 내려오는 길. 이번에는 발밑과 함께 머리 위까지 경쾌하다. 나뭇가지에 얹힌 눈이 녹아 떨어지면서 울리는 소리가 사중주, 오중주의 실내악 연주 같다. 카메라 렌즈가 잡아낸 해는 마치 투명하게 빛나는 유리공처럼 선명하다.

젊은이들이 배낭으로 썰매를 탄다. 뒹굴어도 깔깔거리고, 배낭 속 음료수가 터졌다고 기겁하면서도 깔깔거린다. 주책이지, 나도 배낭썰매를 타본다. 꺄아 비명도 질러본다. 이렇게 눈부시게 아름답고 순정하게 즐거운 시간이 주어지다니! 한 해를 지나며 가차 없는 뙤약볕과 가파른 오르막에 헐떡거릴 날도 있겠지만, 이런 시간의 기억들이 서늘한 그늘과 숨 고를 여유를 만들어주겠지. 고마운 하루였다.

글=김서정(동화작가·평론가), 삽화=공희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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