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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사랑하며-윤고은] 거의 모든 사이즈
C와 나는 종종 이스탄불 여행에 대해 얘기하는데, 그럴 때마다 카펫 팔던 남자도 소환된다. 우리가 이스탄불에서 숄을 하나씩 샀을 때 팔던 청년이 바로 옆 카펫 가게에도 가보라고 했던 것이다. “한국인과 결혼한 남자인데 한국인을 보면 반가워한다”면서 말이다. 만족스러운 쇼핑이기도 했고, 바로 옆집으로 가는 건 힘든 일도 아니었다. 옆집 주인은 의자를 내주고는 휴대폰 속 아내 사진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임신 중인데 한국에 있어서 늘 그립다고 했다. 거기까지가 좋았다. 그러니까 “지난밤 꿈에 아내가 나왔어요” 전까지. ‘지난밤 꿈&rsqu...
입력:2017-09-05 17:40:01
[살며 사랑하며-오병훈] 찐 고구마 두 개
허리가 구부정한 노인이 손수레를 끌고 언덕을 오르고 있었다. 수레에서 짐이 떨어진 줄도 몰랐다. 뒤에서 수레를 밀던 두 명의 여학생 중 한 명이 검은 비닐 뭉치를 들고 “할아버지, 짐 떨어졌어요”라고 말하며 수레에 실어주었다. 수레를 밀어준 것도 모르는 듯 떨어뜨린 짐을 찾은 것에 대해서만 연신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 노인은 크고 작은 비닐봉지를 싣고 다니면서 상점에 배달해주는 포장용기 장수였다. 옆에서 지켜보다가 “노인이 하기에는 너무 힘든 일 아니요?” 하고 물었다. “이런 일이라도 할 수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
입력:2017-09-03 18:25:01
[살며 사랑하며-김서정] 재채기가 무서워
한 달쯤 전 무거운 걸 들다가 허리를 삐끗했다. 그렇게 다쳐본 적이 없던 터라 ‘뭐지?’ 하면서 끙끙거리다가 이삼일 지나 괜찮은 것 같기에 책 정리를 좀 했는데, 다시 쩌르르 등허리가 아프다. 그렇게 괜찮고 아프고를 반복했다. 미련하게 무리수를 두던 내가 정신이 번쩍 든 건 연달아 나온 재채기에 통증이 밀려든 뒤였다. 예삿일이 아니다 싶어 어기적거리며 한의원을 찾아 침을 맞았다. 서울과 제주를 오가고 다른 지방에도 다니고 했던지라 치료는 순조롭지 않았다. 달리 아파본 데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이번 허리 부상은 꽤 색다른 자각으로 나를 끌...
입력:2017-08-31 17:35:01
[살며 사랑하며-윤고은] 이름을 모르는 사이
검색을 많이 한다. 중요한 것도 검색하고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도 검색한다. 궁금한 것 중에는 검색창에 입력할 말조차 생각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으니, 한자 검색이라든지 음악 검색 같은 시스템은 매번 감탄하면서 쓴다. 최근에는 꽃 검색을 시도했는데, 내가 목표로 하는 꽃을 벌들도 목표로 하는 바람에 검색용 사진을 찍지 못했다. 이렇게 되면 옛 방식대로 해야 한다. 꽃 이름을 잘 알 것 같은 사람에게 사진을 보여주는 것이다. 스무고개 하듯 설명하면서 말이다. “흰색이고 여름 꽃인가 봐요, 사진도 있어요. 아아 네. 메밀이나 감자꽃은 아니고요.” 어디 사...
입력:2017-08-29 19:15:01
[살며 사랑하며-유형진] 인생 모티브
처서가 지나고 며칠을 열대우기처럼 비가 내리더니 이제 조석으로 바람이 차가워졌다. 그래서인지 지난겨울에 뜨다 말았던 ‘그래니 스퀘어 모티브’ 담요를 마저 뜨고 싶어졌다. 물론 의사는 다친 어깨 근육의 재활을 위해 손목의 움직임만 있는 뜨개질보단 전신운동을 권장했지만. 뜨개질과 바느질은 내 등단 연차와 같은 유일한 취미다. 마음이 무겁고 머리가 복잡하여 생각이 꼬일 때 바늘과 실을 들고 뭐라도 만들고 있으면 어느새 마음이 가벼워지고 생각은 단순해져서 명쾌한 기분을 느낀 적이 많았다. 뜨개질과 바느질은 여성의 가사노동이 특화된 ‘...
입력:2017-08-27 17:45:01
[살며 사랑하며-김서정] 용감한 엄마들
오늘 아주 용감한 엄마들을 만나고 왔다. 제주시 ‘아기사랑 엄마의 집’에 사는 미혼모들. 아직은 이 용어가 보편적이라서 쓰고는 있지만, 앞으로는 다른 이름이 붙여져야 할 터이다. 아기와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과 책임감, 용기가 남다른 이 엄마들은 훨씬 멋진 이름으로 불려야 마땅하다. 자그마한 원룸에서 홀로 아기를 키우며 공부나 자기계발의 끈도 놓지 않는 엄마들 열 명을 보살피는 복지사를 비롯한 봉사자들도 주목 받아 마땅하다. 만만치 않은 업무와 이런저런 문제에도 그들은 평화롭고 온화한 얼굴이었다. 나는 무엇이 가장 절실한가 물었는데, ...
입력:2017-08-24 18:35:01
[살며 사랑하며-윤고은] 이미 애프터
카메라 관련 장비에는 특별한 관심이 없었는데, 그 세계의 애칭들이 눈길을 끌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애기백통→ 형아백통→ 엄마백통→ 아빠백통→ 새아빠백통’으로 이어지는 가계도 같은 것. 작명에 동의하느냐의 여부는 뒤로 미뤄두더라도 애칭은 확실히 눈길 끄는 간판 역할을 한다. 만두렌즈니 카페렌즈니 기발한 애칭들을 보다가 ‘여친렌즈’에서 눈이 멈췄다. 보편적인 여친렌즈가 두어 개 있었고, 많은 사람이 여친렌즈의 위력을 말하고 있었다. 나는 신이 나서 L에게 그 정보를 보여주었다. “여친렌즈라는 게 있다...
입력:2017-08-22 17:45:02
[살며 사랑하며-유형진] 감동 구름
얼마 전 쿠바를 여행하고 온 어느 소설가의 여행 산문집을 읽다가 아바나의 구름 사진을 보았다. 작가는 아바나 구름을 보기 전까지는 구름에 주목한 적이 없었다고 고백했다. 종이에 작게 인쇄된 사진으로만 봐선 작가가 본 구름의 감동이 전달되진 않았지만, 구름의 모양과 배경으로 봐 저런 크기의 구름을 실물로 보았다면 충분히 감동적이었으리라는 짐작은 되었다. 나는 유년을 시골에서 보내서인지 구름의 모양변화에 관심이 많았다. 그만큼 유흥이 없었고 심심한 유년이었다. 내가 처음 구름의 모양에 주목했던 기억을 떠올려 보니 가장 선명한 기억은 초등학교 5...
입력:2017-08-20 18:40:01
[살며 사랑하며-김서정] 중성화 논쟁
동갑내기 사촌이 근처에 산다. 최근에 식구들이 암고양이 한 마리를 입양해서 키운다. 내 사촌인 아빠는 보기만 해도 입이 벙싯 벌어지고, 엄마는 하루 이틀 집을 비우면 다른 누구보다 고양이 보리가 더 보고 싶더라며 희한해한다. 아들은 뒤치다꺼리를 도맡아 하고, 유학 중인 딸은 노심초사 안부를 묻는다. 고양이 재미를 이제라도 알았으니 다행이다. 엊그제 통화 중에 사촌이 걱정스레 말했다. 보리가 이상하게 울어대. 몇 개월이지? 5개월쯤. 그럼 발정기인가? 달려가 보니 짐작대로였다. 중성화시켜야 해. 내가 단언했다. 사촌은 단호히 반대했다. 의사인지라 성호...
입력:2017-08-17 18:05:01
[살며 사랑하며-윤고은] 시간의 안락사
손목시계는 손목 위에 있을 때 가장 멋져 보인다. 아니면 판매대의 진열장 안에 있을 때. 적어도 이렇게 내 서랍 속에 방치되어 있을 때는 아닌 것 같다. 시계 여섯 개가 마치 잡은 지 오래된 생선들처럼 축 늘어져 있었다. 색깔, 크기, 가리키는 시각이 모두 다른 이들에게 공통점이 있다면 초침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거였다. 시계 약을 교체해달라고 하자 수리점 주인은 시계가 멈춘 지 얼마나 됐느냐고 물었다. 예상치 못한 질문 앞에서 나는 얼버무렸다. “글쎄요, 한 3년은 넘은 것 같은데요. 시계마다 다를 걸요?” 수리점 주인은 멈춘 지 너무 오래되면 약을 갈아...
입력:2017-08-15 17:45:02
[살며 사랑하며-유형진] 에어컨 죄책감
작년 여름도 굉장한 더위였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다. ‘1994년 이후 가장 더운 여름’이라는 수식이 기상뉴스 끝에 붙곤 했었다. 올 여름은 작년보다 더 덥다. 작년엔 집에 에어컨이 있었지만, 실외기에 연결하지 않고 여름을 지냈다. 이사를 겨울에 했었고, 고층의 거실 창문이 맞바람이 통하도록 된 집이었기 때문에 여름을 보내보고 정 덥다 싶으면 그때 실외기에 연결하자 싶은 생각이었다. 게다 2년 후 전세계약이 끝나면 이사를 가야 할 상황인데, 여름한철 잠깐 나자고 거금의 설치비를 들여 에어컨을 연결하는 것도 아까웠다. 재작년 더위는 그럭저럭 ...
입력:2017-08-13 19:00:01
[살며 사랑하며-김서정] 통증 잊는 법
살짝 넘어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나 보다. 왼쪽 엄지발가락을 된통 부딪쳤던 모양이다. 처음에는 조금 욱신거리더니 갈수록 강도가 심해지고, 예닐곱 시간 지나자 발가락이 온통 보라색이 됐다. 신경을 다른 데로 돌려줄 만한 책을 찾아 책장을 훑다가 ‘바퀴벌레 삐딱날개’라는 그림책을 뽑아들었다. 외톨이 바퀴벌레 하나가 음식 재료로 조각품 만드는 걸 좋아하는데, 그 작품은 번번이 도마뱀, 원숭이, 스라소니들이 가로채 먹어버린다. 화가 난 녀석, 자기보다 몸집 작은 잎꾼개미들을 골탕 먹이다가 사로잡혀 군대개미들에게 제물로 바쳐질 처지가 된다....
입력:2017-08-10 18:45:01
[살며 사랑하며-윤고은] 엽서의 미학
십 년 전만 해도 여행할 때 종종 엽서를 부치곤 했는데, 언젠가부터 카카오톡이 대신하게 됐다. 엽서를 넣으면 어느 시점에 알아서 보내준다는 우체통도 종종 만났지만 그럴 때도 나는 카톡을 선택했다. 그 우체통 앞에서 사진을 찍어 보내거나, 지금 그 앞에 와 있다 하고 보냈던 것이다. 그러니 방금 산 엽서 몇 장은 어떤 기능의 ‘부활’을 알리는 신호탄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세심하게 엽서를 골랐다. 이 칼럼에서도 종종 알파벳 하나로 압축되는 지인들에게 부치기 위해서다. 여기는 캐나다 프린스에드워드섬이고, 저 앞에는 루시 모드 몽고메리가 일했던 ...
입력:2017-08-08 17:40:01
[살며 사랑하며-유형진] 신분 유지·상승의 사다리
며칠 후 우리 집 청소년이 고입검정고시를 본다. 현재 우리 아이가 중학교 3년 과정 동안 배워야 할 내용을 잘 알고 있는지 평가할 방법은 국가에서 치르는 검정고시 밖에 없다. 아이는 쉬운 문제라도 그 문제의 예문 하나까지 완벽하게 알고 넘어가려고 하고 있다. 중간에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에선 나와 오랜 시간 토론도 한다. 하지만 아이의 미래에 이런 시간들이 어떤 영향을 주게 될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확실한 것은, 아이가 성인이 되어 사회생활을 하게 될 때면 선택의 여지없이 학교를 다니고 입시를 치러 대학을 나온 아이들과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
입력:2017-08-06 18:30:01
[살며 사랑하며-김서정] 삐뚤빼뚤 목공작품
드디어 좌탁을 완성했다. 아직 사포질과 유칠 같은 뒷손질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꼴은 완전히 갖춘 것이다. 감개가 무량하다. 일주일에 한 번씩, 가끔 빠지기도 했지만, 석 달 동안 매달렸다. 75년 만이라는 제주의 더위에 땀깨나 흘렸고, 끌질 톱질에 손가락 두어 번 베이기도 했으니 그야말로 피와 땀의 결실이다. 주먹장 기법이라는 게 반듯한 아귀가 정확히 딱딱 맞아야 하는데, 삐뚤빼뚤 빈틈이 많아 엉성하기 짝이 없기는 하지만, 그래도 감개는 무량하다. 이걸 만들면서 느낀 게 많다. 무엇보다 나는 이런 일에 정말 소질이 없다는 걸 새삼 확인했다. 나는 손끝이 너...
입력:2017-08-03 18:40:01
[살며 사랑하며-윤고은] 최고의 이륙
비행기에서 바퀴벌레 한 마리와 좌석을 공유한 적이 있다. 일곱 시간의 비행이 끝나갈 무렵에서야 그걸 알아챘다. 먹고 있던 기내식에서 곰팡이를 발견한 적도 있고, 내 좌석 등받이에 안마 기능이 추가된 게 아닌가 싶을 만큼 발길질을 하던 뒷좌석 아이도 있었다. 그러나 이런 일들은 기체가 난기류에 휘말려 요동칠 때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비행기가 심하게 흔들릴 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개인 모니터의 항공정보를 뚫어져라 보는 것뿐이다. 항로, 출발지와 도착지의 시간 같은 정보들 말이다. 그건 목적지까지 정확하게 날아갈 거라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하...
입력:2017-08-01 17:50:01
[살며 사랑하며-유형진] 소음과 음악 사이
2166. 며칠 전 퇴근시간쯤 탔던 2호선 순환선 지하철 칸의 번호다. 휴대폰 배터리는 6%였고, 더 이상 음악을 들으면 집에 도착하기도 전에 끊길 것 같아서 이어폰을 뺐다. 그리고 만원 지하철 안 사람들을 관찰했다. 나는 귓속으로 들어오는 소리만 달리 해줘도 내가 속해 있는 공간을 수시로 이탈하는 좀 귀찮은 습관이 있다. 하지만 음악을 좋아한다 말할 수 없고, 소음을 싫어한다고 말할 수도 없다. 음악이란 단지 음악가에 의해 정교하게 의도된 규칙을 가진 소음이라 생각하는 편이다. 손 선풍기를 들고 청반바지를 입고 있던 20대 여자. 내 옆에 기둥처럼 서 있던 ...
입력:2017-07-30 17:55:01
[살며 사랑하며-김서정] 두려움이 필요해
얼떨결에 스쿠버다이빙 체험을 했다. 깊은 바다에서 물고기들과 노니는 꿈을 가끔 꾸기는 했지만 이렇게 현실로 이루게 될 줄은 몰랐다. 세계 10대 포인트에 들어간다는 서귀포 앞바다 작은 섬은 다이버들로 흥겹게 북적였고, 물속은 스노클링으로 잠깐 들여다본 것만으로도 환상적이었다. 남들은 물먹기 일쑤라는 호흡훈련도 아무 문제가 없었다. 나는 타고난 다이버인가 봐! 그러나 막상 바다에 몸을 집어넣자 머릿속이 하얘졌다. 물속은 곧바로 절벽인 데다 발밑은 깜깜했다. 호흡도 스노클링 때와 달랐다. 밧줄을 잡고 조금씩 아래로 내려가는데, 어느 순간 숨이 턱 막혔...
입력:2017-07-27 17:50:01
[살며 사랑하며-윤고은] 일상채집자
나는 인스타그램을 한다. 매일 접속하지는 않지만, 반나절 내내 들여다보기도 한다. 내가 인스타그램에 게시물을 올리는 과정을 아는 L은 그걸 ‘집필활동’이라고 부른다. 게시물을 올리기에 앞서 퇴고를 거듭하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게시물을 올려야겠다는 생각이 들면 진짜 게시물은 그 결심으로부터 한참 후에 올라간다. 그 사이에 나는 구상을 하고 초고를 쓰고 퇴고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내가 엄청나게 많은 글을 쓰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내 인스타그램 게시물엔 활자가 많이 등장하지도 않는다. 그럼 대체 난 뭘 구...
입력:2017-07-25 17:15:01
[살며 사랑하며-유형진] 진짜 배려
어깨가 다친 동안 안 쓰던 근육을 다시 쓸 수 있게 되니 삶의 질이 달라졌다. 아직도 완전히 회복된 것은 아니지만, 염증을 제거했더니 밤마다 통증에 시달리며 잠을 못 자 짜증나고 우울하던 것들이 사라졌다. 건강할 때는 잘 몰랐지만 몸이 아프게 되니 이 세상은 양 팔을 마음대로 쓰고 두 발로 잘 걷는 사람들 위주의 세상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물론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많은 이들이 이 사회는 건강한 사람들이 경제활동을 해서 이끌어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장애인 중 많은 경우, 선천적 장애보다 사고나 병으로 인해 장애를 ...
입력:2017-07-23 18:40:01
[살며 사랑하며-김서정] 배고픈 맹랑이
우리 집 고양이 맹랑이는 열두 살. 사람으로 치면 거의 환갑이다. 그런데 아직도 손을 빤다. 아침에 일어나 잠이 약간 덜 깬 시간이면 오른쪽 앞발을 쪽쪽쪽쪽 소리가 나도록 정신없이 빨아댄다. 그 부분은 털이 누레져서 아무리 씻어줘도 제 색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맹랑이는 길고양이 출신이다. 두 달쯤 된 새끼고양이가 골목길 쓰레기통 위에서 목이 터져라 울어댄다고, 누가 좀 키워달라는 글과 사진이 고양이카페에 올라왔다. 길고양이 새끼는 보통 바퀴벌레처럼 숨어 다니기 마련인데 녀석은 제 살길을 인간에게서 찾아보겠다고 당차게 나선 셈이다. 그 기개가 마...
입력:2017-07-20 18:45:01
[살며 사랑하며-윤고은] 반려폰
내 휴대폰의 나이는 1년 반쯤 됐다. 오십 번은 땅에 떨어뜨린 것 같은데 액정이 멀쩡하고, 노트+펜과 카메라 기능도 좋고, 그립감도 좋다. 단지 약점은 통화가 좀 안 된다는 거다. 전화 통화를 할 때 어떤 사람들은 내게 이렇게 묻는다. “어디세요? 바람이 아주 많이 부는 곳에 계시나 봐요.” 그 시각 난 내 방 책상 앞에 앉아있을 뿐인데. 내 휴대폰은 장소를 좀 가린다. 집 안에서 통화 상태가 가장 양호한 곳은 내 방 책상 앞이다. 부엌에서는 도마 위에 휴대폰을 올려놓고 잘게 다지는 것처럼 말이 들린다. P는 만날 때마다 휴대폰을 바꾸러 가자고 한다. ...
입력:2017-07-18 18:35:01
[살며 사랑하며-유형진] ‘아름다운 구속’의 해방
주중에 2박3일 집이 아닌 곳에서 혼자 지내다 왔다. 결혼 후, 아이를 낳고부터는 한 번도 외박할 일이 없었다. 4년 전 예술인지원금을 받으려고 프로젝트를 신청하여 그 워크숍으로 다녀온 1박2일 외에는 전무했다. 믿기 어렵겠지만 나는 그동안 가족과 함께 가는 여행이 아닌 나 홀로 여행을 한 적이 한 번도 없다. 생각해보니 아파서 병원에 입원하지 않는 한, 유부녀이자 아이의 엄마인 여자는 집이 아닌 곳에서 혼자 지낼 그 어떤 명분도 이유도 없었던 것이다. 지금이 어느 때인데 이런 고리타분한 생각을 하고 있냐고 따지고 싶겠지만. 이 사회에서 특별한 직업이 없는 ...
입력:2017-07-16 17:50:01
[살며 사랑하며-김서정] 나를 울린 남자
한 모임에서 ‘나를 울린 남자’가 화제로 나온 적이 있었다. ‘어떤 남자 때문에 울었다’가 하나씩 풀려나왔는데, 내 차례에 나는 네로를 입에 올렸다. 외국인을 사귄 적이 있었단 말이냐, 이탈리아 남자냐, 자리가 떠들썩해졌다. 그게 아니라 ‘플란더스의 개’에 나오는 네로다. 네로와 파트라슈가 얼어 죽는 마지막 장면에서 거의 통곡을 했다. 아마 중학교 2학년이었을 것이다. 나의 대답이었다. 나는 그때 하마터면 맞아 죽을 뻔했다. 나이 탓인지 더위 탓인지, 요즘 책을 읽어도 별 감흥이 안 생긴다. 주목의 대상이라는 소설을 ...
입력:2017-07-13 18:20:01
[살며 사랑하며-윤고은] 폭우 속의 수박
당일치기로 일본 유후인에 갔던 우리에게 허락된 시간은 다섯 시간 남짓이었다. 우리는 유명하다는 롤케이크로 허기를 달랜 후 유후인의 폭우 속을 산책했다. 우산을 쓰는 게 별 의미 없어 보일 만큼 비가 쏟아졌지만, 비는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는 시간의 흔적들을 한 겹씩 벗겨내기에 모든 것이 더 선명해졌다. 색감도, 냄새도. 그러다 오후 세 시가 지나서 늦은 점심을 먹기 위해 식당을 찾아갔지만 확실히 애매한 시간대였다. 모든 식당이 ‘휴식’ 푯말을 내걸었고 우리가 버스를 타고 이곳을 떠난 뒤에나 다시 열 계획이었다. 결국 편의점에서 도시락을 샀다. ...
입력:2017-07-11 17:15: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