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윤고은] 몸을 입은 옷



우산을 챙겨 나간 날은 펼쳐볼 일도 없더니, 일기예보를 간과하고 나간 날은 꼭 비가 온다. 그 결과가 비닐우산 몇 개로 남아 있다. 네댓 개가 뽀송뽀송한 채 대기 중인데도, 밖에서 비를 만날 때는 또 우산이 없는 것이다. 며칠 전에도 그랬다. 버스 차창에 빗방울이 맺히는 걸 보고서야 아침의 일기예보를 떠올렸다. 오후부터 비가 온다는 걸 알고도 우산 챙기는 걸 놓친 거였다. 내 한 몸이면 좀 더 초연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문제는 늘 내 몸이 동반한 것들이었다. 일단 물에 닿지 않아야 할 귀고리와 목걸이부터 빼기 시작했다. 그것들을 휴지에 감싸 가방 안쪽 주머니에 넣었다. 하필 그날의 가방은 천 소재로 되어 있어 비에 젖기 좋았는데 가방보다도 그 안에 노트북이 들어있다는 게 더 신경 쓰였다. 가죽 소재의 구두와 세탁소에서 어제 찾은 코트까지도 내게 딸린 식구가 너무 많지 않은가. 이럴 때 집에 있는 분홍색 땡땡이 장화가 우산을 들고 마중 나오면 좋겠지만.

비닐우산을 살 만한 정류장에 내릴 수도 있었지만 마침 비가 좀 잦아든 것도 같아서, 나는 집에서 최단거리의 정류장에 내리기로 했다. 그 길엔 우산을 살 만한 곳은 없고 집까지는 8분 정도 걸어야 했다. 좀 뛰면 5분 만에 주파할 수도 있겠지만, 비에 젖은 낙엽을 잘못 밟았다가는 미끄러질 수도 있다. 이제 하차 준비를. 3, 2, 1…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누군가가 우렁차게 박수를 쳐주기 시작했는데, 비였다. 더 굵어진 빗줄기가 그렇게 마중을 나와 있었다. 등을 새우처럼 구부려 가방을 감싸고 빛의 속도로 걷기 시작했다. 바들바들 떨기도 했다. 결국 코트도 가방 안에 넣었으니까. 그날 가장 비가 쏟아지는 구간을, 가장 비가 쏟아지는 시점에 통과하고 있는 것만 같았는데, 나는 내가 단지 비옷이라고 생각했다. 걸어 다니는 거대한 비옷, 그 덕에 내 귀중품들은 괜찮았다. 거울 속에 마스카라가 번져 눈가가 어두워진 생쥐 한 마리가 보이긴 했지만. 그 생쥐는 ‘프로+비옷’처럼 몸을 좌우로 가볍게 털고는, 한동안 말없이 접혀 있었다.

윤고은(소설가), 그래픽=공희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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