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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사랑하며-윤고은] 내 것이 아닌
일부러 떠올리려는 건 아닌데 극장에 갈 때마다 자동적으로 동반되는 기억이 있다. 좌석 틈새에 팝콘 부스러기가 박혀 있는 장면이다. 의자의 테두리처럼 느껴질 만큼 촘촘하게. 그걸 본 이후로 나는 부직포 형태의 1회용 의자 커버 같은 걸 상상하게 됐고, 공공장소의 청결에 대해 고민해보게 됐다. 어디 극장뿐이랴, 최근 보도된 것처럼 특급호텔이라고 해도 청결을 보장받는 건 아니다. 변기와 객실 유리잔을 같은 솔로 닦는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이들도 있겠지만 애초에 기대하지 않은 이들도 있다. 호텔에 놓인 컵이나 전기포트, 쿠션과 웰컴푸드를 아예 건드리지 않...
입력:2018-03-07 14:21:05
[살며 사랑하며-김태용] 기억의 저편 이야기
얼마 전 장인어른이 응급 수술을 받았다. 고령에 몸 상태가 좋지 않아 수술이 어렵고 수술 후에도 회복이 쉽지 않을 거라는 의사의 말이 있었다. 평소 귀가 잘 들리지 않은 장인어른에게 가족들은 가벼운 수술이라고, 잠깐 주무시고 나오는 거라고 메마른 손을 잡아주며 안심을 시켰다. 수술실 앞에 모인 가족들이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장인어른이 몇 달 전 평소 잘 가는 동네 의원에서 대장내시경 검사 의뢰를 받고도 이 사실을 가족들에게 말하지 않고 병원도 가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평소 자신의 건강을 다소 과신하고 가족들에 대한 걱정 때문이라는 것에 한...
입력:2018-03-07 14:21:09
[살며 사랑하며-김서정] 돌아온다 2
눈이 드디어 그쳤다. 막혔던 길은 대부분 풀렸다. 목공방에도 갈 수 있게 됐다. 다양한 테트리스 도형을 자유롭게 쌓아 여러 모양으로 조립 가능한 책장을 완성해 둔 터였다. 기름칠이 다 말랐을 테니 가져오기만 하면 되는데, 안달만 하고 있었다. 자, 가자! 깨끗해진 큰길을 택했으면 괜찮았으련만, 가는 눈이 아쉬웠던 나는 중간에 다른 길로 접어들었다. 큰길에서 1∼2킬로미터 상관이니 큰 차이는 없겠지. 하지만 큰 오산이었다. 제설차가 미처 다녀가지 못한 그 작은 길은 거의 스키장 슬로프 수준이었다. 늘 다니던 길인데, 거기가 그렇게 오르막이 심한 줄은 ...
입력:2018-03-07 14:21:06
[살며 사랑하며-윤고은] 상냥한 취객
언젠가 P는 중간에 똑떨어진 맥주를 사기 위해 집 근처 슈퍼마켓으로 갔다. 계산대의 김선희 아주머니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했다. 술기운이 아니었다면 인사를 건네지 못했을 것이다. 좀 쑥스러웠지만 평소 감사했던 마음을 그 순간 꼭 전하고 싶었다. 평소 뭐가 감사했는데? 내가 묻자 P가 말했다. “이거 1+1이니까 한 개 더 가져오시라, 5만 원 이상 구입하면 2000포인트 추가다, 이런 거 말씀해 주셨거든요.” 겨우 그걸로? 고개를 갸우뚱하는 내게 P는 몇 장면을 더 소개했다. “항상 밝으셔서 기분이 좋고요. 취객을 달래서 내보내시...
입력:2018-03-07 14:21:07
[살며 사랑하며-김태용] 컬링, 표정의 기술
평창 동계올림픽이 시작되고 며칠 뒤 2월 12일자 칼럼에서 ‘닦기의 기술’이란 컬링에 대한 글을 쓴 적이 있다. 이후에도 시간이 날 때마다 컬링 경기를 보고 하이라이트까지 찾아보면서 전문 용어들과 경기 규칙들을 보다 세세하게 이해하게 되었고, 가슴을 졸이는 승부의 장면들에 감탄하곤 했다. 비단 나뿐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컬링에 대한 관심을 갖고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었을 것이다. 그 중심에는 한국 여자단체팀의 빙판 위를 미끄러지는 스톤과 깨기의 기술, 피하기의 기술, 닦기의 기술이 있다. 거의 전승에 가까운 실력으로 결승까지 진출했고, ...
입력:2018-03-07 14:21:07
[살며 사랑하며-김서정] 돌아온다 1
거의 일주일 폭설로 제주가 마비되다시피 한 때였다. 한라산을 넘는 도로는 일찌감치 통제되었다. 그 길을 활보하던 나는 제주대 앞 사거리에서 딱한 장면을 보게 되었다. 조그만 승합차 하나가 우회전을 하다가 눈 쌓인 길을 구별 못해 차도 대신 인도로 올라선 것이었다. 앞으로도 뒤로도 못 가고 헛바퀴만 맹렬하게 돌리는 차를 한 청년이 끙끙대며 밀고 있었다. 나는 달려들어 손을 보탰지만, 넘어지기만 했을 뿐 힘이 되지는 못했다. 차에는 두 청년이 있었는데, 편의상 하나는 동글이, 하나는 길쭉이라고 부르자. 운전하던 동글이는 자기가 밀 테니 나더러 액셀을 밟...
입력:2018-03-07 14:21:07
[살며 사랑하며-윤고은] 세배를 위한 세배
세배와 세뱃돈의 관계는 필요조건인가 충분조건인가, 특히 아이들의 경우에. 나도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까지는 세뱃돈을 받았고 그걸 당연하게 생각했지만 세배와 세뱃돈이 반드시 같이 가는 거라고 생각하지는 못했다. 돌아보면 나는 괜찮다면서 세뱃돈을 사양하기도 하는 아이였으니까. 내가 적어도 한 번쯤은 했던 “괜찮아요”는 마음에 없는 소리였지만 신기하게도 그렇게 말하는 순간 마음도 말을 따라 움직이곤 했다. 정말 세뱃돈은 중요하지 않은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둘의 관계가 괜히 궁금해진 건 내가 세뱃돈을 주는 입장이 된 후의 일이다. 해마다 ...
입력:2018-02-20 17:25:01
[살며 사랑하며-김태용] 불안의 책들
가끔 글이 안 써지거나, 멍해질 때, 혹은 잠이 들기 전에 문학점(占)을 칠 때가 있다. 문학점이라는 것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우연히 책을 펼쳐 첫눈에 들어오는 문장을 읽고 글쓰기의 영감을 받거나 그날의 명언으로 생각하게 된다. 팔괘와 오행 등을 따지는 수학적이고 신비한 점괘를 기대할 수는 없지만, 카드 뒤집기나 쌀알 던지기 등의 우연처럼 문학점을 칠 수 있는 책은 여러 가지다. 성경과 동서양 고전들이 될 수도 있고, 여행책, 요리책도 가능할 수 있을 것이다. 나에게도 몇 권의 책들이 있는데 그중의 하나가 ‘페드난두 페소아’의 ‘불안의 책’...
입력:2018-02-18 18:00:01
[살며 사랑하며-윤고은] 뚝뚝 탄 풍경
‘자전거 탄 풍경’의 ‘너에게 난, 나에게 넌’을 들으면 8년 전 어느 밤이 떠오른다. 자정 가까운 시간, 나는 태국 치앙마이의 타패문 앞에 서 있었다. 두 시간 후 인천행 비행기를 타야 했다. 택시를 탈 예정이었고, 예약된 택시가 아니라는 것만도 나름 모험이었는데 결과적으로 내가 올라타게 된 건 택시도 아닌 뚝뚝(TUKTUK)이었다. 뚝뚝이 택시보다 훨씬 저렴한 요금을 불렀던 것이다. 오토바이와 자동차를 섞은 듯한 삼륜차 뚝뚝은 태국의 흔한 교통수단이긴 했으나, 그것을 타고 도심을 벗어나는 건 생각해본 적이 없어 잠시 망설였다. 그러...
입력:2018-02-13 18:40:01
[살며 사랑하며-김태용] 닦기의 기술
평창 동계올림픽이 시작됐다. 개막식 전날부터 집중해 보는 경기가 있는데 바로 컬링이다. 겉보기에는 스피드와 화려함이 없어 보이지만 경기 규칙과 선수들의 몸놀림을 보고 있으면 어느새 웃음이 터지고 탄성을 지르게 된다. 마치 반복적인 말과 행위를 통해 웃픈 현실을 풍자하는 부조리극처럼 보이기도 한다. 스톤, 브룸, 페블, 스위핑 등의 용어들을 듣고 있으면 정말 부조리극의 대가인 사무엘 베케트의 글에 나오는 단어들 같다. 돌, 빗자루, 자갈, 쓸기라니 바로 우리 일상의 언어들 아닌가. 그리고 스톤을 위치시켜야 할 원형의 자리는 하우스다. 상당한 작전 능력이 ...
입력:2018-02-11 18:15:01
[살며 사랑하며-김서정] 양철 인간의 사랑
‘오즈의 마법사’를 번역하고 있다. 눈이 책과 컴퓨터 화면을 쉴 새 없이 왔다갔다 해야 하는 번역작업은, 안 그래도 위태로운 시력에 몹시 폐가 된다. 그래서 긴 글 사양해온 지 오래지만 이 책은 물리칠 도리가 없었다. 내가 좋아하는 마이클 모퍼고가 강아지 토토의 시점으로 다시 쓴 오즈의 마법사라지 않는가. 도로시 일행이 숲 속 양철나무꾼을 만나는 지점에서 마음이 딱 멈췄다. 그는 자신이 왜 양철인간이 됐는지 설명한다. 가난한 나무꾼이었던 그는 숯쟁이 딸과 사랑에 빠지지만 여자의 엄마가 반대를 한다. 돈 많고 전도유망한 읍내 청년이 더 어...
입력:2018-02-08 17:45:01
[살며 사랑하며-윤고은] 불쌍한 팬티
사람들은 어떤 방식으로 낡은 속옷과 이별하는 걸까. 한때 나는 그런 게 다 궁금했다. 겉옷이야 의류수거함에 넣기도 하고 팔기도 하고 나눠 입기도 하지만 속옷엔 좀 한계가 있으니까. 그래서 여기저기 물어본 적이 있는데 어떤 이들은 의류수거함이나 헌옷수거 업체를 활용한다고 했고, 어떤 이들은 일반쓰레기로 버린다고 했다. 조각조각 잘라서 형체를 불분명하게 한 다음 버리는 이도 있었다. 내 경우엔 창틀 청소를 할 때 활용하곤 했는데, 요즘엔 다른 방법을 찾았다. 낡은 속옷과 구멍 뚫린 양말을 따로 챙겨두면 여행 중에 일회용으로 쓰기 좋아서다. 여행지에서도 ...
입력:2018-02-06 18:20:02
[살며 사랑하며-김태용] 나는 찍는다, 고로 존재한다
요즘 시간이 나면 국립현대미술관을 찾는다. 서울 지하철 안국역에서 몇 개 골목을 지나 미술관으로 걸어가는 것은 내가 사랑하는 일 중 하나다. 언젠가 그 길을 모티브로 짧은 에세이 영화를 한 편 만들고 싶기도 하다. 현재 미술관에서는 미국 실험영화의 대부라고 소개되는 ‘요나스 메카스’ 전시와 영화들이 상영되고 있다. 사적이고 실험적인 영상들에 관심이 많은 나에게 그의 이름은 낯설지 않지만 그의 영화들을 극장에서 볼 기회는 흔치 않았다. 그의 영화에는 반전과 스펙터클이 없다. 실험영화 특유의 충격적인 이미지도 없다. 장면은 자주 끊기고, 영...
입력:2018-02-04 18:25:01
[살며 사랑하며-김서정] 그림책, 길을 걷다
그림책을 ‘데리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다. 작가, 교사, 도서관이나 책방 사람, 학생…. 하는 일도 나이도 다양한 어른들이다. 그들은 그림책 한 권을 품에 넣고 걷기 좋은 길을 찾아 모인다. 걸으며 얘기를 나누다 적당한 자리에 둘러앉아 책 이야기로 들어간다. 책 이야기라고 했지만 그것을 평가하거나 분석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책이 나와 특별히 만나 파장을 일으킨 지점을 나누는 것이다. 그 나눔이 끝나면 책도 나눈다. 자신의 책을 선물하고, 남의 책을 선물로 받는다. 새로운 책이 각자에게 또 다른 파장을 일으킬 것을 기대하면서. ‘그림...
입력:2018-02-01 17:50:01
[살며 사랑하며-윤고은] 윙크, 만화경
교토의 만화경 박물관에 갔다. 거울의 반사를 이용해 갖가지 색과 패턴을 보여주는, 말 그대로 만화(萬華·온갖 화려한)를 부르는 도구. 다양한 형태의 만화경 중에 긴 원통형 하나를 집어 들고 입구의 작은 구멍에 눈을 맞췄다. 누구나 만화경에 한쪽 눈을 들이밀면 몇 초라도 고요해진다. 다른 쪽 눈은 감은 채로, 윙크를 부추기는 이 구멍은 크기가 작기 때문에 오로지 1인용일 수밖에 없다. 만화경 속 세계는 극장 스크린이나 TV처럼 함께 보는 게 아니라 오롯이 혼자 누리는 세계다. 내가 보던 만화경을 다른 이에게 권할 때 할 수 있는 말은 “봐봐” 정도...
입력:2018-01-30 17:40:01
[살며 사랑하며-김태용] 강릉 여행
1박2일의 짧은 일정으로 강릉에 다녀왔다. 20대 후반에 입학한 문창과에서 만난 친구들이었다. 뒤늦게 합류한 어린 친구가 있지만 비슷한 나이대와 술을 좋아한 것 말고는 별다른 공통점이 없었다. 문학을 보는 시선과 삶에 대한 신념도 달랐다. 이십 년 가까이 시간이 흘러 ‘강릉 가기 프로젝트’란 이름으로 채팅방을 만들고 일상의 피로함과 시시한 농담을 주고받곤 하는데 이년 전부터 계획한 강릉 여행을 드디어 간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강릉으로 삶의 자리를 바꾼 H형을 보러 간 것이다. 뭔가 들뜬 기분의 우리를 맞이한 것은 목발을 짚고 다리에 깁스 ...
입력:2018-01-28 18:00:01
[살며 사랑하며-김서정] 착하고 깊은 숲
제주에는 돌이 많다. 그 말은, 흙이 적다는 뜻이다. 식물이 살아갈 터전이 절대 부족한 것이다. 그런데도 제주는 푸르다. 푸른 식물들은 어떻게든 어디에든 발을 붙이고 살아간다. 시멘트 바닥에 싹을 틔운 민들레에 가슴이 먹먹해진 적이 있던 사람이라면 제주에서는 가슴을 움켜쥘 준비를 해야 한다. 그런 다음 곶자왈에 가봐야 한다. 곶자왈은 돌투성이 땅에 형성된 숲이다. 나무들은 돌 위에 뿌리를 내린다. 깊게 내리지 못한 채 옆으로 뒤틀리고, 땅밖으로 나온다. 그렇게 간신히 돌을 붙들고 선 나무들은 얼마나 마음이 아슬아슬할까. 거센 바람이 얼마나 무서울까. ...
입력:2018-01-25 19:00:01
[살며 사랑하며-윤고은] 누구에게나 구체적인
모임의 가장 노련한 진행자는 음악이다. 나는 가끔 의도적으로 윤종신의 노래를 선택하는데, 그의 노랫말이 대화를 부르기 때문이다. 언어의 조탁 솜씨 때문에, 모두가 동시에 조용해졌다가 방금 우리가 들은 부분에 대한 상념을 나누게 된다. 상념이란 말이 나와서 말인데, 그가 작사한 ‘상념’도 가끔 튼다. ‘나를 버리고 떠나가버려 상념 상념 상념 네가 어떻게 내게 이럴 수 있니 상념 상념…’ 그 노래를 처음 들어본 C는 재차 제목과 노랫말을 확인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상념이 아니네.” 그래, 그런 거다. 문맥상 상념보다는 비슷한 ...
입력:2018-01-23 18:30:01
[살며 사랑하며-김태용] 안녕, 팡슈이
글을 쓰는 사람에게 산책은 생존의 양식 같은 것이다. 거리의 간판과 소음을 따라 걸으면서 머릿속에 떠다니는 잡생각들이 하나의 문장으로 혹은 이미지와 장면으로 만들어질 때의 황홀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제목과 첫 문장이 떠올라야 글을 시작할 수 있는 나 같은 작가에게는 더욱 그렇다. 여타의 사람들도 문득 머릿속을 스치는 단어들을 만날 때가 있을 것이다. 은밀한 순간을 맞은 것처럼 그 단어를 계속 입으로 굴리다가 어느 날 완전히 잊어버리기도 한다. 미세먼지 가득한 날 오후, 환경에 저항하려는 혹은 적응하려는 심리의 발동으로 눈앞이 뿌연 거리를 걸었...
입력:2018-01-21 18:05:02
[살며 사랑하며-김서정] 풀뿌리문화
동생이 쉰 중반에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 집 고양이는 바이올린에서 끼익 끄억 줄긋는 소리가 나면 얼굴을 찌푸리며 방을 나가버리곤 했다(우리 집 고양이는 내가 기타를 배우기 시작할 때 내 발을 물어뜯곤 했다). 고양이 눈총을 받으며 굳건하게 연습하던 동생은 지역 오케스트라에 가입하더니, 작년 말 연주회를 했다. 가족과 친척과 친구들이 꽃다발을 들고 콘서트홀에 모였다. 홀을 제법 가득 채운 청중들 모두 그런 가족, 친척, 친구들이었을 것이다. 단원 대부분이 아마추어인 오케스트라는 뜻밖에도 훌륭한 소리를 들려주었다. 긴장했다가 안도했다가, 민망...
입력:2018-01-18 17:50:01
[살며 사랑하며-윤고은] 먼지 조심하세요
다음 주가 크리스마스라고 해도 믿을 만큼 해 바뀐 실감이 없다. 2018년이 새것처럼 낯설기만 한데, 그나마 위안이 되는 건 2017년도 여전히 낯설다는 사실이다. 1월은 늘 실감이 부족한 달이다. 더 믿기 어려운 건 내후년까지의 달력이 첨부된 다이어리에서 2020년을 봤다는 것이다. 애니메이션 ‘2020 우주의 원더키디’를 보고 자란 내게 2020은 너무 우주적인 숫자다. 그 애니메이션 속에서 지구는 현재형으로 기능하지 못한다. 자원은 바닥나고, 환경은 파괴된, 돌이킬 수 없는 고향일 뿐이다. 꽤 우울한 미래를 그린 애니메이션이었는데, 지금 보면 현실...
입력:2018-01-16 17:35:01
[살며 사랑하며-김태용] 사라진 깃털
얼마 전 새 작업실을 얻었다. 들뜬 기분으로 작업실을 단장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옷을 걸어둘 고리를 벽에 달고 있을 때였다. 머리 뒤에 센서가 달린 것처럼 뭔가가 스멀스멀 올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뒤를 돌아보았고, 아주 잠시 동안 얼어붙고 말았다. 의자에 던져두었던 패딩이 흘러내려 전기난로에 붙어 있던 것이다. 그제야 타는 냄새가 난다는 것을 인지하고 서둘러 사태를 수습했다. 패딩의 뒷부분이 타들어가 구멍이 뚫렸고 깃털들이 빠져나오고 있었다. 더 큰일로 번지기 전에 다행이라는 생각과 함께 또 방심하고 말았군, 이라고 자책을 하면서 정리를 했다...
입력:2018-01-14 18:25:02
[살며 사랑하며-김서정] 산들바람과 칼바람
며칠째 제주에 바람이 거세다. 배도 운항 중지, 비행기도 타기 어렵다. 광주에 갔던 사촌 일가족은 이틀째 발이 묶여 있다. 나는 내일 아침 서울에 가야 하는데, 비행기가 제대로 뜰지 모르겠다. 공항에서 하염없이 기다려야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니, 8년 전 브라질 아동청소년도서전에서 한국이 주빈국이었던 해의 일이 떠오른다. 나는 한국 어린이 책에 관해 발표하기로 하고 리우데자네이루로 향했다. 집을 떠나 리우 숙소에 도착하기까지 무려 30시간. 파리 공항에서 환승 대기 5시간. 동행도 없었던지라 정말 끔찍한 시간이었다. 어쩌자고 책을 안 챙겼던 나는 할 수 ...
입력:2018-01-11 17:30:01
[살며 사랑하며-윤고은] 오류의 생존방식
요즘 ‘아무말대잔치’라고 봉합해 버리는 화법도 생겨나긴 했지만, 여전히 말은 쉬운 도구가 아니다. 가끔 명확한 설계도 같은 말을 만나면, 그걸 듣는 것만으로도 머릿속이 정리되는 것 같다. 어떤 생각과 방법을 타인에게 전달하는 데 능숙한 사람들이 있다. 자동차에 앉은 채로 우리를 지탱해 주는 바퀴의 회전에 대해 설명하던 운전 선생님이 그랬고, 전화통화만으로 내 프라이팬 위의 상황을 통제해 주던 요리 선생님이 그랬다. 그중에 최고는 요가 선생님이다. 수강생이 많으면 선생님의 동작을 볼 만큼의 시야가 확보되지 않는 경우도 있으니 말이 절대...
입력:2018-01-09 17:35:01
[살며 사랑하며-김태용] 모든 순간이 詩다
주변에서 조용한 입소문을 타고 들려오는 영화가 있다. 바로 짐 자무시 감독의 ‘패터슨’이다. 영화 ‘패터슨’은 미국 뉴저지주의 소도시 ‘패터슨’에 살고 있는 ‘패터슨’이라는 이름을 가진 버스운전사의 일주일간 일상을 담아내고 있다. 월요일이라는 자막과 함께 시작한 영화는 패터슨이 6시30분께 눈을 뜨고, 가볍게 아침식사를 하고, 아내 로라가 싸준 도시락을 들고 출근해 버스를 운전하고, 폭포가 있는 강가에 앉아 혼자 도시락을 먹고,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아내와 함께 저녁식사를 한 뒤, 애완견 마빈을 ...
입력:2018-01-07 17:4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