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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사랑하며-윤고은] 그뤠잇한 스튜핏
항공권 검색 앱 중의 하나인 ‘스카이스캐너’는 멋진 기능을 갖고 있다. 출발지를 ‘대한민국’으로, 도착지를 ‘어디나(everywhere)’로 설정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전국 모든 공항에서 어디론가 향하는 비행편이 쭉 뜬다. ‘가장 저렴한 달’을 지정하는 항목도 유용하다. 나는 수시로 이런 과정을 즐기면서 이걸 ‘손가락 관절운동’이라고 부른다. 이 운동의 묘미는 도착지를 ‘어디나’로 두는 데에 있다. C는 그 손가락 관절운동을 부추기는 친구다. C와의 여행은 이런 식으로 시작된다. 내가 &ldqu...
입력:2017-11-07 17:25:01
[살며 사랑하며-오병훈] 누룽지
산행 때마다 누룽지를 한 봉지씩 가지고 오는 이가 있었다. 남들은 비상식으로 캐러멜이나 초콜릿 같은 것을 가져오는데 그는 한결같이 누룽지였다. 이가 부러질 것 같이 딱딱하지만 작은 부스러기를 물고 한참을 굴리다 보면 입안에 침이 고이면서 고소한 맛이 살아났다. 확실히 오랜 기억속의 누룽지 맛이었다. 누룽지는 가마솥에서 긁어내야 제 맛이다. 무쇠솥은 아무리 밥물을 잘 조절한다고 해도 자칫 밥을 태울 수밖에 없었다. 예전에는 집집마다 누룽지를 긁는 놋숟가락이 하나쯤 있었다. 너나 할 것 없이 먹을 것이 부족한 때였다. 식구 수대로 밥을 푸다 보면 어머니...
입력:2017-11-05 17:30:01
[살며 사랑하며-김서정] 무화과나무
자그만 화분을 선물 받았다. 큰 가지 하나와 거기서 비어져 나온 작은 가지 하나로 단출한 무화과나무였다. 작은 가지가 별 변화를 안 보이는 동안 큰 가지는 무럭무럭 자랐다. 저러다 혹시 화분이 넘어지기라도 하지 않을까 걱정스러울 정도였다. 그러던 어느 순간, 큰 가지가 성장을 딱 멈췄다. 무성하던 잎들도 차례차례 밑에서부터 떨어져 나갔다. 대신 작은 가지에서 또 작은 가지들이 하나둘 솟아나왔다. 이파리도 속속 피어나왔다. 작은 가지와 잎들이 보기 좋게 기세를 떨치는 동안 큰 가지에는 맨 위의 작은 잎 하나만 남았다. 다 죽은 모양이다. 저걸 잘라내야 하나....
입력:2017-11-02 18:45:01
[살며 사랑하며-윤고은] 층간욕설
내가 사는 아파트에서도 종종 층간소음이나 층간흡연에 대한 언급이 있었는데, 난 별 관심이 없었다. 딱히 그 불편에 연루된 적이 없으니 그저 강 건너의 일로 생각했다. 그런데 두 달 전부터 상황이 달라졌다. 베란다에서 담배 냄새가 나기 시작한 것이다. 출처를 모르는 담배냄새는 분명, 침입자였다. L은 베란다 창을 열고 종이에 불을 붙여서 지금 연기가 위로 올라오는 게 확실하다고 말했다. 우린 그런 실험까지 해야 했다. 나는 얼굴을 창밖으로 내밀고 소리를 질렀다. “누가 담배를 집에서 피워! 매너도 없다아아아!” 허공을 향해 과장된 기침까지 했다. 그러...
입력:2017-10-31 17:30:01
[살며 사랑하며-오병훈] 수수팥떡
매달 한 번씩 식물탐사를 하고 있다. 지난 일요일에는 안면도로 가는 차 안에서 한 회우가 수수팥떡을 담은 도시락을 열었다. 손녀의 생일떡이라며 하나씩 맛보라고 했다. 참으로 오랜만에 먹은 수수팥떡이었다. 옛날엔 집안의 자녀가 생일을 맞으면 무병장수하라는 뜻으로 수수팥떡을 해 먹었다. 생일날을 기념하여 가족은 물론 이웃에도 나눠 주고 건강을 빌었다. 수수팥떡은 여럿이 나눠 먹을수록 아이에게 좋다고 했던가. 수수는 우리 말 발음이 한자어 목숨 수(壽)자와 같다.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수수(壽壽)이니 오래, 아주 오래 명이 길기를 빌었던 셈이다. 게다가 수수...
입력:2017-10-29 17:50:01
[살며 사랑하며-김서정] 따라비 오름의 개
비가 오락가락하는 주말이었지만 오름에 올랐다. 분화구 세 개가 아름답게 흐르는 능선을 만들어 오름의 여왕이라고도 불린다는 따라비 오름. 억새가 한창인 계절이니 날씨 상관없이 장관이리라는 생각이었다. 과연 멋진 풍경이었지만, 아무래도 억새는 햇빛과 바람 아래 보아야 제격이다. 비바람 속의 억새에는 왠지 가슴이 살짝 에인다. 그런데 그보다 더 가슴 에이는 광경이 있었으니, 비바람 고스란히 맞으며 하염없이 오름을 오르내리던 개 한 마리였다. 오름 정상에 난데없이 나타난 녀석은 이 사람 저 사람 기색을 살피며 돌아다녔다. 그러더니 나를 앞질러 내려갔...
입력:2017-10-26 18:10:01
[살며 사랑하며-윤고은] 줄서기의 달인
나는 ‘생활의 달인’이라는 TV 프로그램을 좋아하지만, 매번 챙겨보지는 않는다. 페이스 조절 때문이다. 방송을 보고 나면, 결국 달인의 가게에 가서 줄을 서게 되니 말이다. 원고 마감을 하지 못한 채 달인의 베이글이나 크루아상을 먹기 위해 줄을 선 적이 꽤 있다. 편집자를 여기서 만나지는 않겠지, 마음 졸이면서. 아마도 몇 주 후엔 홍성의 어느 호떡집 앞에 가 있을 것이다. 방송일로부터 몇 주의 간격을 두고 가는 건 오래 기다리지 않기 위한 요령인데, 나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지 몇 달 후에 가도 인파 속에 묻히는 경우가 꽤 있다. 달인의 가...
입력:2017-10-24 18:05:01
[살며 사랑하며-오병훈] 능이
시골 친지로부터 귀한 선물을 받았다. 스티로폼 상자를 여는 순간 고향산천의 꽃향기와 물소리가 묻어나는 것 같았다. 내용물을 다칠세라 이끼를 깔고 덮은 정성이 겹겹이 배어 있었다. 능이 몇 송이에서 그토록 풍성한 가을을 느낄 수 있다니. 올해는 송이도 대풍이어서 값이 예년에 비해 많이 떨어졌다고 한다. 뒷산에서 능이도 함께 돋아났으리라. 보내준 분의 고마운 마음을 생각하면 혼자 먹을 수 없어 싱싱할 때 가까운 이웃과 나누었다. 현대인은 송이를 귀한 맛으로 생각하여 가장 값진 버섯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옛사람들은 달랐다. ‘일능이 이표고 삼송이&rsquo...
입력:2017-10-22 17:45:01
[살며 사랑하며-김서정] 용감한 엄마들 2
이 지면에 제주의 미혼모 공동체 이야기를 쓴 적이 있다. 가장 필요한 게 엄마들의 치아 치료라는 사실이 마음에 남았다. 뭐라도 할 수 있는 게 있을까 싶어 치과의사인 사촌동생에게 연락을 해봤다. 베트남으로 이민을 간 동생이 틈틈이 진료 봉사하는 이야기를 SNS에 두어 번 올린 적이 있던 터다. 동생은 아는 사람에게 말해보겠다, 의사들 커뮤니티에 올려보겠다, 하고는 제주치과의사협회에 연락해보라며 번호를 주었다. 그런 전화를 거는 일은 왜 그렇게 어려울까. 한참을 벼르고, 할 말을 머릿속에서 정리하고, 심호흡을 하다가 다른 일을 핑계로 미룬다. 몇 번을 그러...
입력:2017-10-19 17:40:01
[살며 사랑하며-윤고은] 동전 한 닢
마르탱파주의 소설 ‘완벽한 하루’에는 에밀리 디킨슨의 시집을 사는데 수입의 대부분을 쓰는 독자가 나온다. 전 지구인이 읽게 하는 것이 그의 목표여서 매달 꾸준히 책을 사고 여기저기 몰래 뿌리는 행위를 계속한다. 나는 아직 그런 독자를 만나지 못했으므로, 어쩌면 내 책을 가장 많이 산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일지도 모른다. 책을 낼 때마다 발송 목록을 최소화하고 있지만, 내게 책을 보내준 분께는 나도 보내야 하니 적어도 오십 권은 사게 된다. 출판사에서 책을 발송하기도 하지만, 간혹 내가 우체국서 부쳐야 하는 경우도 생긴다. 언젠가 한번은 책 오십...
입력:2017-10-17 17:35:01
[살며 사랑하며-오병훈] 유명 메이커
소녀는 혼자 훌쩍이면서 등교하는 날이 많았다. 그날도 실내화만 신은 발을 종종거리면서 앞서고 뒤에 어머니가 운동화를 들고 따르고 있었다. 또 신발 때문에 집에서 야단을 맞은 것 같았다. 가세가 어려운 어머니로서는 10세 딸이 그저 멋을 부리는 줄만 알았다고 했다. 값싼 운동화를 신은 소녀를 두고 또래 아이들이 놀려서 학교 가는 것이 싫다는 말을 들었다. 생활이 어려운 홀어머니는 재래시장에서 값싼 옷이며 신발을 살 수밖에 없었으리라. 우리의 어린 시절을 생각해본다. 그때는 ‘국산품 애용’이라는 말을 입에 담고 살았다. 외제를 쓰는 행위를 매국이...
입력:2017-10-15 18:00:02
[살며 사랑하며-김서정] 미로 체험
벼르던 미로공원에 가봤다. 혼자 갔다가 애먹었다는 체험기를 읽고서 연휴 일행 많을 때까지 미뤄뒀던 터였다. 날은 화창했고 가족 여행객들로 공원은 북적였다. 그 뒤만 졸래졸래 따라다니면 미로 빠져나오기는 일도 아닐 거라는 예상은, 하지만 살짝 빗나갔다. 그 많은 사람이 모두 헤맨 마의 구간이 없지 않았던 것이다. 헤매는 사람들의 다양한 반응을 보는 일은 뜻밖의 즐거움이었다. 잔뜩 미간을 찌푸린 채 길 몰라? 허 참, 허 참!을 되뇌는 장인 앞에서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지도만 들여다보는 사위는 그중 딱한 경우였다. 허 참, 그냥 재미로 헤매도 될 일을 가지...
입력:2017-10-12 17:40:01
[살며 사랑하며-윤고은] 기록하는 자유
내가 머물렀던 암스테르담의 호텔에서는 ‘THINK IN INK’라는 문장을 자주 볼 수 있었다. 리듬감이 먼저 눈에 들어왔고, ‘잉크로 생각’하라는 메시지에 공감했다. 그리고 이 도시에서 방문객이 가장 많은 집, 프린선흐라흐트 263번지에서 그 문장을 곱씹게 됐다. 이 집에는 책장으로 가려진 통로가 하나 있는데, 그 경계를 통과하면 오디오가이드의 안내도 멈춘다. 안네를 포함한 여덟 명의 사람들이 이 책장 뒤에서 2년간 숨어 지냈다. 나치즘이 점령한 시기, 그들은 유대인이었다. 결국엔 발각되어 모두 수용소로 보내졌고, 종전 이후 이 집에 돌...
입력:2017-10-10 17:40:01
[살며 사랑하며-오병훈] 비둘기할머니
정오 무렵에 가끔씩 공원에서 비둘기할머니를 만날 수 있다. 사람들은 비둘기를 돌보는 할머니한테 유해조류에게 먹이를 주면 위법이라고 말린다. 그렇지만 할머니는 가엾은 비둘기들을 위해 자주 공원을 찾는다. 큰 가방에 조며 싸라기 봉지를 가지고 다니면서 배고픈 비둘기와 참새들에게 모이를 뿌려준다. 도심의 비둘기 무리에서는 발가락이 없거나 발목이 잘린 놈을 쉽게 찾을 수 있다. 모두 실이 감겨 발가락이 잘린 비둘기들이다. 먹이를 구하기 어려운 비둘기들은 쓰레기장을 뒤적인다. 발가락에 실이 감기면 그 실을 벗기려고 발버둥치다가 다른 발가락마저 감기게 ...
입력:2017-10-08 17:05:01
[살며 사랑하며-오병훈] 올바른 판단
길에서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다. 어깨너머로 얼핏 보니 누군가 쓰러져 있는 것 같았다. 한 청년이 남자를 인도로 끌어 올리고 있었다. 옆 사람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어봐도 잘 모른다고 했다. 청년의 옆얼굴이 낯이 익었다. 구경꾼을 헤치고 다가갔더니 바로 우리 이웃집 학생이었다. “아니 학생, 어떻게 된 일인가?” “안녕하세요. 이 아저씨가 차도에 쓰러져 있기에 인도로 옮겨주려고요. 날도 저물어가는데 여기서 잠들면 교통사고라도 당할 것 같아서요.” “그래, 잘 했어. 119구조대에 신고는 했고?” 옆에 있는 분이 신고를 했다...
입력:2017-10-01 16:10:02
[살며 사랑하며-김서정] 남자다움
새벽 비행기 안. 자리 운이 좋지 않다. 가운데 자리인 데다 양옆에는 커다란 덩치의 남자들이다. 둘 다 다리를 떠억 벌리고 앉아 있다. 아무리 옹송그려도 어딘가가 닿는다. 이 사람들은 왜 이런 자세로 앉는 거지? 진심으로 궁금하다. 안 그러는 남자들도 있으니 신체적 불가항력도 아닐 테고, 저걸 남자다움의 표상이라고 여기는 걸까. 그러면서 책을 펼친다. 게리 폴슨의 ‘피시본의 노래’. 게리 폴슨. 그는 엄청나게 남자다운 소재가 특기다. 야생에서 홀로 살아남기, 극한상황 헤쳐 나가기, 비정한 사회에서 싸워 버티기. 주인공도 거의 언제나 남성이다. 80...
입력:2017-09-28 17:35:01
[살며 사랑하며-윤고은] 사물의 바디랭귀지
우리를 동요하게 만드는 것, 삶에 어떤 소요를 불러오는 것이 늘 거창한 존재들만은 아니다. 흔해서 도처에 널려 있는, 사소한 풍경이 가진 동력을 무시할 수 없다. 이를테면 방금 내린 커피 한 잔에서 뜨거운 김이 솟는 걸 볼 때 새삼 설레곤 하는 것이다. 이건 마치 ‘사물의 바디랭귀지’ 같은 거라서, 시끄럽지 않지만 그래서 더 강렬하다. 사물과의 조우는 내가 이 세계의 주인이 아니라 소외된 이방인이라는 걸 인식하는 데에서 시작된다. 내가 어느 공간에 있든, 사물의 개체수가 나보다 많을 테니까. 사물의 정글 속에 나 홀로 던져졌다는 생각을 하면...
입력:2017-09-26 18:35:01
[살며 사랑하며-오병훈] 할머니의 사탕
달리는 전철 안에서 예닐곱 살쯤 돼 보이는 아이가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른다. 옆에 앉은 젊은 엄마가 조용히 하라고 제지했으나 아이는 막무가내였다. 손에는 로봇 장난감을 들고 노래를 하는데 가사를 알아들을 수 없었다. 옆자리의 아가씨는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은지 자리를 피했다. 또 앞에 서 있던 신사도 눈살을 찌푸릴 뿐 아이의 행동을 제지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엄마도 아이를 어찌할 수 없는지 손가락을 입에 대고 그냥 조용히 하라는 표시를 할 뿐이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아이가 갑자기 큰 소리를 지르며 엄마한테 떼를 쓰기 시작했다. 뭐라고 떠들지만 엄...
입력:2017-09-24 18:00:01
[살며 사랑하며-김서정] 전용차로 사고
교통사고를 당했다. 제주공항을 막 벗어나 시내로 가는 길이었다. 1차로가 버스전용차로임을 알리는 파란색이어서 나는 2차로로 가고 있었다. 내비게이션이 앞 교차로에서 좌회전하라고 일렀고, 신호등은 직진 좌회전 녹색이었다. 제주보다 먼저 전용차로가 도입된 서울에서 오래 운전한 경험에 의하면 전용차로의 버스는 늘 직진을 하고, 좌회전을 하려면 2차로로 빠져서 일반 차들과 함께 간다. 직좌 동시진행이라면 일반차로용 신호다. 자동으로 그렇게 간주한 나는 핸들을 돌렸다. 얼핏, 왜 전용차로 신호등이 없지? 싶었다. 전용차로 신호등이 빨간색으로 들어와 있어...
입력:2017-09-21 18:00:01
[살며 사랑하며-윤고은] 산책의 이유
그날 공항에서 나는 C를 알아보지 못할 뻔했다. 저기 C를 닮은 반쪽짜리 무언가가 있긴 했는데 설마 C는 아니겠지…. C였다. 겨우 며칠 사이에 C는 반쪽이 되어 있었다. 과로와 과음으로 목소리가 안 나올 지경이었고, 이쯤 되면 그녀가 여권을 챙겨온 게 신의 가호라고 봐야 했다. 우리의 여행은 공항에서 약을 사는 것으로 시작됐다. C는 나만 믿었고, 나는 여행 가이드북만 믿었다. 출간된 지 3년이 넘은 여행 가이드북이었지만 뭐 얼마나 바뀌었겠어, 하고. 목적지는 중국 상하이였다. 도시의 3년이란 긴 시간이었다. 우리가 어떤 목적지에 가기 위해 호텔 앞에...
입력:2017-09-19 17:45:01
[살며 사랑하며-오병훈] 가을의 맛, 양하
시장으로 가는 건널목 어귀에 벌여 놓은 채소 노점상. 그 남자는 언제나 오후에 나와 자리를 잡고 상추며 부추, 얼갈이배추 같은 것들을 팔았다. 어떤 때는 가지, 오이, 호박 따위 농산물을 무더기로 펼쳐놓고 손님을 기다리기도 했다. 가끔씩 일터에서 돌아올 때 이곳을 지나게 되는데 특별한 것을 보면 걸음을 멈추었다. 봄철이면 두릅이나 노란 씀바귀 뿌리, 취나물 같은 산채를 팔 때도 있었는데 어머니가 좋아했던 것들이라 무슨 보물이라도 만난 듯 덥석 사곤 했다. 그럴 때는 집으로 가는 발걸음에도 휘파람소리가 나게 마련이었다. 어제 그 남자의 노점에서 눈길...
입력:2017-09-17 17:40:01
[살며 사랑하며-김서정] 낭독의 즐거움
이번 학기에는 옛이야기에 대한 강의를 한다. 사회교육대학원이라 학생들은 나이가 좀 있는 사회인이 대부분이다. 종일 일한 뒤 저녁에 또 두어 시간을 책상에 앉아 있어야 하니 피곤하고 배고프고 졸린 게 당연하다. 수업보다는 휴식과 간식에 더 마음이 가는 게 인지상정이다. 나는 가능하면 편안하고 재미있고 활기찬 시간을 만들어주고 싶다. 배고프지 않은 시간은, 학생들이 순번제로 간식을 장만해오는 걸로 스스로 만들어가고 있으니까. 그런데 그들은 재미있는 시간도 스스로 만들어가고 있다. 읽어온 이야기를 설명하는 순서에 설명 대신 공동 낭독을 시작한 것이...
입력:2017-09-14 17:35:01
[살며 사랑하며-윤고은] 문학상, L, 성공적
나는 이상○문학상 수상자다. 어디서 들어본 듯도 한 상이지만, 진짜 저 상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이상문학상 말고 이상○문학상 말이다(개인정보보호를 위해, 또 쑥스러우니 한 음절을 ○로 처리하겠다). 그건 내가 2010년에 첫 번째 소설집 ‘1인용 식탁’을 냈을 때 L이 준 상이다. 그 상에 대해 먼저 제안한 건 나였을 것이다. 당신이 이 책을 대상으로 상을 주면 어떻겠어, 하고 말이다. 그러니까 이 책 안에 담긴 아홉 편의 소설이 모두 후보작인데, 그 중에 L이 가장 좋았다고 생각한 작품에 상을 주는 것이다. 나는 신이 나서 L에게 ...
입력:2017-09-12 17:30:01
[살며 사랑하며-오병훈] 억새꽃
현관으로 들어서자 실내가 환하게 밝아졌다는 느낌이다. 우산꽂이로 쓰는 작은 항아리가 오늘따라 더욱 선명하게 반짝이는 것 같다. 가을인가. 억새의 계절이 왔어도 도심에서 일상에 쫓기다 보면 가을을 느끼지 못하고 지내기 일쑤다. 골목에 버린 억새꽃 한 다발을 아이가 지나치지 않고 갖고 와 꽂아둔 것이리라. 억새꽃 한 움큼이 어두운 실내를 온통 너른 초원으로 만들었다. 하얀 억새꽃이 나부끼는 창녕 화왕산으로 나를 데려간다. 억새 줄기는 연약한 듯 보이지만 절대로 꺾이는 법이 없다. 세찬 바람에 잠시 고개를 숙이는 듯하지만 다시 일어서는 억새의 자존심. ...
입력:2017-09-10 18:05:01
[살며 사랑하며-김서정] 갈치의 죽음
바다낚시를 나갔다. 봄에 나갔던 낚시에서는 손바닥만 한 돔 세 마리 겨우 잡은 채 멀미에 시달렸던 터라 이번에는 미리 멀미약을 먹었다. 열 명 남짓 낚시 체험 관광객을 실은 배가 뉘엿뉘엿 지는 해를 뒤로하고 십 분쯤 달려 바다 위에 자리를 잡았다. 드물게 날씨가 좋아 거뭇한 한라산의 거대한 실루엣이 선명한 선을 그리며 눈앞에 펼쳐졌다. 어두운 청보랏빛으로 짙어가는 하늘에 깔린 오묘한 주황 노을은 시나브로 움츠러들고 있었다. 명색은 한치 낚시였지만 세 시간 동안 한치는 아무도,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 대신 올라온 것들은 풍성한 갈치와 더 풍성한 고등어, ...
입력:2017-09-07 17:45: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