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김서정] 한밤중 아무도 몰래



아주 사랑스러운 그림책을 보았다. ‘한밤중에 아무도 몰래.’ 조그만 여자 아이 하나가 한밤중에 문득 눈을 뜬다. 같은 방의 언니는 아무리 흔들어도 안 일어나고 엄마 아빠도 쿨쿨 자고 있다. 아이는 할 수 없이 혼자 화장실에 간다. 그런 뒤 부엌으로 가서는 냉장고를 열어 고양이에게 우유를 주고 체리를 살짝 꺼내 먹는데, ‘야단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나는 이 대목이 정말 좋다! 할짝할짝 우유를 핥는 고양이 앞에 쪼그리고 앉아 아이가 바야흐로 커다랗고 빨간 체리를 막 입안으로 집어넣으려는 장면에 가슴이 뭉클해진다. 한밤중이지만 주위는 하나도 어둡지 않다. 짙고 옅은 보라가 주조인 색조가 뭔지 흔들리면서 들뜬 아이의 마음을 나타내는 것 같다. 아이의 맨발에도 차갑겠다는 걱정은 들지 않는다.

이 꼬마는 언니의 오르골, 공책, 필통, 색연필을 ‘빌려와’ 이불을 뒤집어쓰고는 그 안에서 혼자 한참을 논다. 그리고 밝아오는 창밖에서 구구거리는 예쁜 비둘기까지 구경하고 난 뒤 언니 침대 발치에서 고양이와 함께 몸을 동글게 말고 잠이 든다. 아이의 하룻밤 대담한 일탈과 모험은 이렇게 평화롭게 마무리된다. 이 책을 수업시간에 읽어주니, 선생보다 나이 많은 할머니에 우락부락해 보이는 아버지 학생들 얼굴에 함박 미소가 번진다. 그리고 어린 시절 한밤중에 깨어난 일에 대한 추억이 쏟아진다. 우락부락 아버지가 제일 열을 올린다. 벽에 비친 말린 생선 그림자에 놀라 오줌 누러 나가지도 못하고 벌벌 떨던 시간이 되살아나는 모양이다. 사랑스러운 책을 함께 읽으면 둘러앉은 사람들도 다 사랑스러워 보인다.

생각해보니 나의 제주살이가 이 하룻밤 모험 같다. 많은 일을 내려놓으니 야단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사계절 자연의 다채로운 모양과 색채와 소리를 마음껏 가지고 논다. 조만간 혼내는 사람도 있는 한낮의 일상으로 돌아가야 할 때가 오겠지. 하지만 아직 밝아오는 아침과 구구거리는 비둘기를 구경할 시간, 몸을 동글게 말고 잠들 시간도 남아 있겠지. 감사한 일이다.

글=김서정(동화작가·평론가), 삽화=공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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