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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사랑하며-황시운] 그 남자의 사랑법
남자가 태어나기 석 달 전, 아버지가 죽었다. 아버지 없는 인생은 신산하고 외로웠다. 남자는 다섯 살 터울의 형이 먼 친척 집에서 머슴을 살아 보내주는 보리쌀로 죽을 끓여 먹으며 유년 시절을 버텼다. 지친 몸을 뉠 방과 죽을 끓일 장작은 어머니가 밤낮으로 품을 팔아 마련했다. 남자의 어머니는 언제나 남자가 먹고 남은 죽에 물을 한 대접 더 부어 끓여 먹곤 했다. 남자에게 머슴을 살러 집을 떠난 형과 묽은 죽만 먹던 어머니는 가슴에 박힌 가시처럼 내내 아픈 존재였다. 형처럼 머슴을 살진 않았지만, 남자도 지게를 질 수 있게 된 이후로는 산, 들, 바다, 가릴 것 없...
입력:2018-09-14 04:10:01
[살며 사랑하며-하주원] 아이 돌보는 것
유치원 건물이 기울고 일부 철거한다는 소식을 보며 밤에 발생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씨랜드, 세월호와 같은 대형 참사를 피한 것만으로도 일단 다행이다. 하지만 갑자기 아이들이 갈 곳 없다는 이야기를 듣고 엄마들이 얼마나 발을 동동 구를지 상상하니 안타까웠다. 이런 비상시 아이들을 돌보아 줄 수 있는 기관이나 시스템이 부족할 테니까. 첫째를 낳았을 때 갓 전문의를 취득한 임상강사였다. 그 시절 아침 6시에 출근, 밤 10시쯤 퇴근이 반복됐고, 가끔 밤에 응급실로 달려가기도 했다. 그 시간 동안 갓난아기를 맡길 곳이 없으니 시부모님과 합...
입력:2018-09-12 04:10:01
[살며 사랑하며-신용목] 사랑이라면 충분하다
누가 직업을 물으면 난감하다. 내 이름 뒤에는 대개 ‘시인’이라고 씌어 있지만 그걸 직업이라고 해도 좋을지 모르겠고, 시 쓰는 일을 ‘노동’이라고 말하기에도 좀 애매하다. 천상병 시인은 ‘가난이 직업’이라고 말했지만 이제 그런 낭만을 멋으로 받아줄 만큼 우리는 여유롭지 않은 듯하다. 최근엔 주로 ‘백수’라고 말하고 살짝 미소를 곁들이는데, 그러고 나면 짧은 순간 상대방도 나도 슬쩍슬쩍 서로의 표정을 살핀다. 인정하기 싫어도 백수라는 정체성 속엔 묻는 사람을 미안하게 만들고 답하는 사람을 주눅 들게 하...
입력:2018-09-10 04:05:01
[살며 사랑하며-황시운] 휴식 없는 휴게시간
4년 전 부모님 댁에서 독립해 나오면서 장애인 활동 지원 급여를 이용하기 시작했다. 휴일을 제외한 날마다 활동 보조인이 우리 집을 방문해 집안일은 물론 샤워와 배변, 상처 소독 같은 일을 도와준다.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배변조차 하기 힘든 나 같은 사람에게 활동 보조인은 ‘생존을 도와주는 사람’이다. 말이 쉬워 장애인 활동 보조이지 타인의 배변 과정을 돕고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성인을 씻기는 게 쉬운 일이겠는가. 그런데도 장애인 활동 보조인들은 최저시급을 약간 웃도는 수준의 급여밖에는 받지 못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이 일은 나이...
입력:2018-09-07 04:05:01
[살며 사랑하며-하주원] 잘 헤어지는 것
직원이 둘인 작은 병원에서 2년간 열심히 일해주신 직원께서 이제 그만둔다고 한다. 아이들을 훌륭하게 키운 뒤에 병원 일을 시작해서, 자격증을 딴 후 이곳이 첫 직장이었다. 내가 ‘어른이 처음이라서 그래’라는 책을 쓰는데 있어서도 큰 영감을 주신 분이다. 원래의 자리를 지키면서도 새로운 발전을 멈추지 않아 늘 공부했고, 기계적으로 일하는 것이 아니라 늘 정성으로 고객들을 대했기 때문이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나도 많이 놀랐고 늘 배웠다. 떠나는 것은 아쉽고 내가 무엇을 서운하게 했을까 별 생각을 다 했다. 그러나 나도 예전에 직장을 옮길 때...
입력:2018-09-05 04:05:02
[살며 사랑하며-신용목] 구월의 마음과 달
대지를 잃어버린 인간이 화분을 키운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아파트에 살면서 17층 공중까지 화분을 여럿 가져다놓았다. 말하자면 땅을 잃고서 그 땅을 겨우 한 삽씩 떠 모셔온 것인데, 나무와 꽃들이 제 크기를 찾아 자라는 틈엔 돌멩이만 포개놓은 것도 하나 있다. 딴에는 숲과 수풀 사이 바위 계곡도 곁들이겠다는 심사여서 언젠가 궁금한 방문자 앞에서 나름의 해설을 곁들일 준비도 마쳤다. 나는 그들의 집사로 일한다. 원래 그들의 가지를 쳐주는 것은 바람의 일이고 물을 주는 것은 구름의 일이었으니, 일주일에 한 번꼴로 나는 바람과 구름이 되어 자연의 일을 ...
입력:2018-09-03 04:10:01
[살며 사랑하며-황시운] 우리에게 허락된 생
튼튼한 두 다리로 어디든 갈 수 있었던 시절, 한 번씩 낯선 곳으로 떠나 혼자서 오래 걸었다. 돌이켜보면 모든 것이 불확실했던 시절을 나는 걸으면서 견뎠던 것 같다. 절정의 녹음에 파묻힌 한여름 정선의 2차선 국도를, 사나운 겨울바람이 몰아치는 남해의 해안도로를, 수많은 전설을 간직한 채 늙어가는 서해의 작은 섬들을, 어린 왕의 비극을 고스란히 목격한 영월의 강변을, 시커먼 기름을 걷어내고 끝내 다시 반짝이는 태안의 소금밭을 걷고 또 걸었다. 그러다 지치면 아무 곳에나 주저앉아 하염없이 숲을, 바다를, 강을, 소금밭을 바라봤다. 너울대는 아지랑이 속에서, ...
입력:2018-08-31 04:10:02
[살며 사랑하며-하주원] 기억의 편향
기억은 결코 공정하지 않다. 현재의 감정 상태로 인해서 과거를 다르게 기억하게 된다. 예를 들어 지금 기분이 우울할 경우 살면서 내가 잘못했거나 남에게 손해를 봤던 기억 등 부정적인 사건을 더 떠올린다. 우울한 사람에게 긍정적 단어와 부정적 단어를 같은 개수로 불러준 뒤 잠시 후 그것을 기억해내라고 하면 신기할 정도로 부정적 단어부터 기억해낸다. 내가 일부러 그러는 것이 아니고 뇌가 하는 일이다. 평가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사람들 앞에서 주목받거나 발표 상황을 불안해하는 사회불안장애 환자의 경우 중립적인 표정의 사진을 봐도 그 얼굴 표정을 화...
입력:2018-08-29 04:05:01
[살며 사랑하며-김태용] 안녕, 평양
얼마 전 몇 명의 소설가와 북한을 배경으로 쓴 소설을 엮어 ‘안녕, 평양’이라는 책을 출간했다. 낯설고 금기시된 소재이기에 쉽지 않은 작업이었다. 불가해한 공간인 동시에 북한의 정보가 한정되어 있고, 많은 부분 왜곡되어 있어 소설의 리얼리티와 윤리적 문제를 해결하기가 어려웠다. 아무리 상상력을 동원해도 손에 닿을 듯 보이는 끔찍한 현실과 뒤틀린 역사를 부정할 수는 없었다. 애초에 이 책의 운명 또한 가혹한 편이었다. 4년 전 출판사의 청탁을 받고 소설을 썼다. 당시에는 북한에 대한 정보가 거의 막혀 있고, 참혹한 실상만 강조되던 시기였기에 ...
입력:2018-08-27 04:10:02
[살며 사랑하며-황시운] 잔혹 동화
앞집 숟가락이 몇 개인지, 뒷집 백구가 새끼를 몇 마리나 낳았는지 훤히 꿰고 살았을 것이다. 제 어미가 청상의 몸으로 기른 붉은 대문 집 남매가 얼마나 번듯하게 자랐는지, 귀하게만 키운 파란 대문 집 사대 독자가 어떤 망나니짓을 하고 다니는지 마을 사람 모두가 알고 있었을 거다. 해마다 서너 번은 마을회관에 동네 노인들을 모셔놓고 정성껏 마련한 음식을 대접했을 테고, 혼자 사는 노인이 한동안 보이지 않으면 누구든 한 사람쯤은 들러 안부를 확인했을 것이다. 혼기가 차고 넘치는 마을 청년이 이국의 색시를 만나 아이라도 낳으면, 온 마을이 잔치 분위기에 빠졌...
입력:2018-08-24 04:10:01
[살며 사랑하며-하주원] 통계는 통계일 뿐
누구나 무엇을 생각하고 어떻게 행동하는지에 대해서 자신이 속한 집단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우울증을 예로 들면, 여자가 남자보다 우울증에 더 많이 걸리는 까닭은 여성호르몬의 영향이 무엇보다 크다고 알려져 있다. 물론 사회적인 젠더의 영향도 있을 것이다. 폭력의 피해자가 되는 경우가 남자에 비해 더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많은 연구들이 단순한 우울감이 아니라 우울증 발병에는 생물학적인 요소, 즉 호르몬의 영향이 더 크다고 보고 있다. 또한 이민자로 살아가는 소수민족, 독신으로 사는 60대, 교대근무를 하는 의사나 간호사 등 우울증에 걸릴 확률이 ...
입력:2018-08-22 04:10:01
[살며 사랑하며-김태용] 사랑하는 손
최근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을 본방 사수하고 있다. 이 드라마 때문에 일주일을 기다린다고 하면 과장이겠지만 올여름의 한 주기가 ‘미스터 션샤인’과 함께 움직이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한국 역사상 가장 무력하고 불안하고 여백이 많은 구한말을 배경으로 아픔과 의지를 가진 인물들의 이야기가 몰입을 하게 만든다. 정동의 미국 영사관과 덕수궁 대안문(大安門) 등의 세트도 드라마의 재미와 동시에 시대적 의미를 함의하고 있다. 현재의 대한문(大漢門)을 당시의 대안문으로 살렸다는 것도 흥미로운 부분이다. 신식 여성이 모자를 쓰고 경박...
입력:2018-08-20 04:05:01
[살며 사랑하며-황시운] 대체 가능한 젊음
최근 한 대형병원에서 입원 병동의 간호사들에게 야간에는 신발 대신 수면양말을 신고 근무하라는 지시가 내려졌다고 한다. 팀장급 관리자가 직접 수면양말을 나눠주기까지 했다는데, 간호사들의 발소리가 수면을 방해한다는 환자들의 민원이 있어 내려진 조치라고 했다. 이런 사실을 세상에 전한 이는 바닥에 혈액이나 소변이 흘러 있기도 하고 앰풀 조각과 주삿바늘 같은 것들이 떨어져 있기 쉬운 병동에서 양말만 신고 근무하는 일은 대단히 위험하다고 설명했다. 수면양말을 나눠준 관리자가 몰랐을 리 없는 사실이었다. 또한 환자들의 잠을 깨운 발소리의 주인이 간호사...
입력:2018-08-17 04:05:01
[살며 사랑하며-하주원] 선택의 기회
광복절이 되면 내가 겪지 못했지만, 지금 우리 삶에 큰 영향을 주는 일제 시대에 대해 상상하고 고민해보게 된다. 나는 진주 하씨인데 같은 성씨가 전국에 22만명가량인 데다가 나는 수도권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하지만 경남 진주 인근에서 활동하며 독립투사들을 끔찍하게 고문했던 진주 하씨 경찰에 대한 이야기를 알게 된 후, 그저 성씨가 같다는 이유로 마치 내 잘못인 것처럼 가슴이 두근두근했다. 사실이 아니길 바라지만, 진주 하씨 문중에서 그의 친일 행적에 대한 기록을 없애기 위해 애썼다는 소문을 듣고도 몹시 부끄러웠다. 물론 어떤 사람이 나에게 지금 2018...
입력:2018-08-15 04:05:01
[살며 사랑하며-김태용] 비자림로는 느리게 가는 길입니다
얼마 전 제주 비자림로의 도로 확장을 위해 삼나무 900여 그루가 잘려나갔다. 시민들과 환경단체 등의 국민청원과 항의로 공사는 일시 중단되었다. 교통 불편을 해소하고 지역경제를 위한 정책으로 이해될 수도 있지만 그 이면에는 제주 신공항 건설을 위한 개발의 시작이라는 목소리들이 들려온다. 새로운 대안을 위해 공사는 중단됐지만, 언제나 그렇듯 개발과 보호가 맞설 때는 대부분 개발로 밀어붙였던 과거의 행정이 되풀이될 것 같아 우려된다. 한국의 가장 아름다운 도로로 선정되기도 한 비자림로는 제주에 가면 한두 번씩 지나가게 되는 길이다. 많은 사람들이 ...
입력:2018-08-13 04:10:02
[살며 사랑하며-황시운] 슬픔을 드러내는 방식
몇 가지 검사를 하고 시스토스토미 시술을 받기 위해 대학병원에 입원했을 때의 일이다. 당시 내 맞은편 침상엔 20대 초반쯤 되어 보이는 여자가 입원해 있었다. 여자는 종일 울고 소리 지르며 제 엄마와 싸웠다. 그녀는 끊임없이 통증을 호소하면서도, 가능하면 정자세로 누워 있어야 한다는 의료진의 처방은 따르지 않았다. 게다가 틈만 나면 제 엄마의 눈을 피해 병실 밖으로 도망쳤다. 맨발로 병동 복도나 다른 병실을 기웃거리다 넘어져 있는 걸 간호사들이 수습해 데려오곤 했는데, 그때마다 그녀의 엄마는 무시무시한 욕설을 퍼부으며 여자를 나무랐다. 여자도 지지 ...
입력:2018-08-10 04:10:01
[살며 사랑하며-하주원] 도박의 승자
여러 연구에서는 도박 중독을 2∼4개 유형으로 분류하는데, 각각 이름도 다르고 분류방식도 조금씩 다르지만 결국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는 것 같다. 하나는 우리가 상상하는 도박 중독자에 가까운 사람으로서 승부사 유형이다. 대체로 10대나 20대 초반과 같은 젊은 시절부터 도박을 시작했으며, 충동적이고 도박에서 오는 승리 자체에 굉장히 쾌감을 느낀다. 도박을 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 갈망이 심한 데다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와 같은 충동조절의 문제가 자주 동반되며 대부분 남성이라고 알려져 있다. 다른 유형도 있다. 현실에서의 불안이나 우울을 피하기 위...
입력:2018-08-08 04:10:01
[살며 사랑하며-김태용] 수영장 공포증
초등학교 4학년 여름, 학교에서 단체로 수영장에 간 적이 있다. 한 시간 가까운 거리를 함께 걸어갔었다. 대부분 아이들이 삼각팬티를 입고 있었는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나는 파란색 사각팬티를 챙겨가게 되었다. 애초에 수영복이 아닌 짧은 반바지에 가까운 것이었다. 물놀이를 할 때마다 느슨한 팬티가 흘러내리고 물속에서 누군가 내 팬티를 끌어내릴 것만 같은 불안에 시달렸다. 부자연스럽게 몸을 움직이다 결국 풀장 밖으로 나와 시간이 빨리 지나기만 기다렸다. 더 큰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탈의실의 바구니에 든 옷과 가방이 보이지 않았다. 몇 번이고 주변을 살펴...
입력:2018-08-06 04:05:01
[살며 사랑하며-황시운] 기울어진 세상
부모님 댁의 에어컨이 고장 났다. 십 년을 썼으니 고장이 날 만도 하지만 내내 멀쩡하다가 하필이면 요즘 같을 때 고장이 날 건 뭐란 말인가. 연일 계속되는 폭염에 에어컨 고장 신고가 폭주하고 있다더니, 아니나 다를까 서비스센터에선 닷새 뒤에나 기사님의 방문이 가능하다고 했다. 게다가 워낙 오래된 모델이어서 바로 부품을 구해 수리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는 말도 덧붙였다. 급한 마음에 새로 사려고도 했지만, 설치까지 3∼4주는 기다려야 한다는 공고를 보곤 그마저 포기했다. 하는 수 없이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아빠와 엄마는 내 집으로 오셨고, 올...
입력:2018-08-03 04:10:02
[살며 사랑하며-하주원] 미디어 유발 트라우마
예전에는 직접 보거나 겪은 일이 주로 정신적 트라우마의 원인이 되었다. 물론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에서 보듯 옛 시대에는 끔찍한 집단살해의 생존자가 되거나 공개적인 처형 등을 목격하는 일이 지금보다 잦았다. 지금 우리는 상대적으로 평화로운 시대에 살고 있지만 다른 위험에 처해 있다. 최근에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미디어로 유발된 외상후 스트레스장애(social media induced PTSD)이다. 상영 등급이 정해져 있는 영화보다는 TV 채널을 돌리거나 유튜브의 링크를 따라가다 보면 끔찍한 장면을 접하며 우연히 생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특히 어린이들의 ...
입력:2018-08-01 04:10:01
[살며 사랑하며-김태용] 최인훈, 지성과 감각의 태풍
소설가 최인훈 선생이 돌아가셨다. 한 번도 만나지 않은 사람과도 인연이 있다면 몇 가지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고등학교 시절 최인훈 소설가와 오규원, 김혜순 시인의 글과 존재에 빠져 서울예대 문창과를 가고 싶었지만 나 같은 녀석이 무슨 글을 쓸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 포기하고 말았었다. 군 제대 후 대학을 자퇴하고 골방에서 책과 영화를 보며 3년의 시간을 보내던 때에도 최인훈의 소설들이 펼쳐 보이는 고독과 관념의 세계에 빠져 있었다. 대표작 ‘광장’보다는 ‘회색인’과 ‘서유기’ 그리고 단편 소설들에 더 매료되곤 했다. 최인...
입력:2018-07-30 04:10:02
[살며 사랑하며-황시운] 사라지는 길
아빠가 길을 잃었다. 잠깐이었지만, 늘 다니던 동네 은행에 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을 찾지 못해 헤맸다고 한다. 방향감각을 완전히 상실했던 것 같다고, 아빠를 찾으러 다녀온 엄마가 전해주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아빠는 엄마에게 말했다고 한다. “내가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엄마는 앞으론 너무 멀리 나가지 말라는 말밖엔 할 수 없었다고 했다. 이야기를 전한 뒤 한동안 말이 없던 엄마가 이렇게 말했다. “이제 시작인 거 같은데, 어쩌지?”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맏이인 내가 단단하게 중심을 잡아야 한다고 수도 없이 다짐했다. ...
입력:2018-07-27 04:05:02
[살며 사랑하며-하주원] 새파란 광장
자살한 사람의 80%는 치료와 관계없이 정신건강 관련 질환을 앓고 있었을 확률이 높다. 반대로 자살한 사람의 20%는 정신과서 치료받을 만한 문제가 없는데도 그런 선택을 했다는 의미다. 몇 년 전 통계이므로 심리부검이 점점 활성화되면 자살 원인에 대한 새로운 결과가 나올 수 있다. 심리부검이란 자살 시도자가 아니라 실제 자살자들이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에 대해 원인을 밝히는 최선의 방법이다. 직접 질문할 수 없으니 최고의 방법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서울 지하철 선정릉역의 중앙심리부검센터가 생길 때 방문을 했고 이후 유가족들에게 권해주기도 했지만 다...
입력:2018-07-25 04:05:01
[살며 사랑하며-김태용] 여름의 맛
연일 이어지는 폭염과 열대야 속에서 만나는 사람마다 날씨 이야기를 하고 여름 건강에 대한 안부를 주고받는다. 매년 겪는 여름이지만 이전보다 더 뜨겁고 후텁지근하게 느끼고, 몇 십 년 만에 최고 더위라는 말이 으레 들려온다. 여러 환경적 요인으로 기온이 상승하고 이상 기후 현상이 일어나고 있으나 별다른 도리가 없어 보인다. 자연에 순응하는 동물적 인간으로 돌아가 그늘과 인공 바람을 찾아가게 된다. 더위에 순응할 수밖에 없으니 계절에 맞는 음식을 먹고 잠시나마 여름의 맛을 느끼려고 한다. 어릴 때는 몰랐던 제철 음식을 먹는 기쁨이 나이 듦의 소확행(작지...
입력:2018-07-23 04:05:01
[살며 사랑하며-황시운] 신의 뜻하신 바
혹시, 이걸 알게 하려고 그랬다는 건가. 샤워 도중 찾아온 통증으로 인해 변기 안전바를 붙잡고 늘어지며 이를 바득바득 갈다 말고 중얼거렸다. 오래전 타인들의 입을 통해서 들을 땐 더할 수 없이 폭력적이었던 말이 내 입에서 흘러나온 순간, 뿌옇기만 하던 머릿속이 맑게 정화되는 느낌이었다. 기독교 계열의 대학재단에서 운영하는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가장 불쾌했던 기억은 주말마다 예배 참석을 독려하기 위해 병실을 방문하던 이들에 관한 것이다. 하루아침에 두 다리를 잃고 살이 찢기고 뼈가 갈리는 듯한 통증에 시달리고 있는 내게, 그들은 매번 ‘하나...
입력:2018-07-20 04: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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