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김서정] 11월의 숲



몸이 녹작지근하고 날은 꾸무럭하다. 억새는 바람 속에 햇살 담뿍 받으며 춤추는 걸 보아야 제격이니, 이런 날은 숲에 가는 게 더 낫다. 집 근처 한라생태숲으로 향한다. 휠체어도 다닐 수 있도록 매끈하게 닦인 산책길 뒤쪽으로는 무성한 나무들 사이로 사그락사그락 낙엽을 밟으며 걸을 수 있는 오솔길도 있다. 나는 구불구불 오솔길로 들어선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조금은 붉게 조금은 노랗게 단풍이 들어 있다. 벌거벗은 가지들도 제법 많다. 저 안쪽 내 눈높이 아래 가녀린 나뭇가지 사이에 손바닥만 한 새둥지가 보인다. 여름에는 무성한 푸른 잎이 꼭꼭 감추어 주었겠지. 저리 낮은 곳 저리 작은 집에 깃들어 살던 녀석은 어떤 새일까. 좁은 둥지에서 깨어난 새끼들이 몇 마리였을까. 밀치락달치락 드잡이하며 크던 아기들은 모두 무사히 자라 하늘을 날게 되었을까.

11월의 숲은 못 보던 걸 이렇게 보여준다. 못 맡던 냄새도 풍겨준다. 썩기 시작하는 열매, 조각조각 부서지는 잎, 바짝 말라 불면 부서질 것 같은 곤충껍질. 이런 것들의 냄새가 합창처럼 섞인 듯한 어떤 자극이 콧속을 건드린다. 갑자기 뭔가가 숲에서 오솔길로 쑥 튀어나온다. 앗, 노루다! 근처에 노루생태관찰원이 있다더니, 거기 아이들이 여기까지 오는 걸까? 녀석은 한참을 선 채로 나와 눈을 맞춘다. 감히 움직이지 못하고 있다가 조심조심 주머니에 손을 넣어 휴대전화를 꺼낸다. 하지만 카메라를 불러내니 녀석이 고개를 돌려버린다. 그리고 별로 서두르는 기색도 없이 앞장서서 길을 잠시 걷다가 숲 속으로 사라진다. 나를 쳐다보던 새까만 눈은 그냥 머릿속에만 담아두라는 말인가 보다.

뭔가 투둑 떨어진다. 11월의 숲을 한껏 받아들인 몸이 활짝 열린 모양이다. 귀도 활짝 열려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까지 이렇게 장하게 들리나보다 했는데 애고, 아니다, 비 온다! 그래도 나는 아까 그 노루처럼 서두르지 않고 걷는다. 11월 숲의 비는 맞아주어야 한다. 그래서 지금 콜록거리며 글을 쓰고 있지만, 어떤 충만한 기운의 여운이 내게 아직 힘을 준다.

김서정(동화작가·평론가), 그래픽=공희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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