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김서정] 요가를 하면서



놀다 다친 데에 자동차 사고로 놀란 허리와 다리를 부여잡고 애고애고 한동안 끙끙거리다 주위의 권유로 요가를 시작하게 됐다. 가만히 앉은 채 몸을 이리저리 비틀기만 하는 심심한 운동이라는 선입견이 있어서 전혀 흥미를 못 느끼던 요가를 하게 될 줄은 몰랐다.

그런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요가는 심심한 운동이 아니었다. 그건 정신없이 공을 쫓거나 시간에 쫓기는 대신 차분히 나 자신과 대결하는 운동이었다. 몸을 통해 나를 다시 꺼내 보고 정리하며 재배치할 수 있는 시간을 요가는 베풀어주고 있다.

놀랐던 건 내가 생각보다 다리가 허술하다는 점이다. 사고 후유증을 핑계 댈 수 없을 만큼 시간이 지났는데도 다리 쓰는 자세에는 맥을 못 춘다. 힘도 균형감도 유연성도 없다. 오래도 잘 걷고 높이도 잘 올라간다고 으스댈 일이 하나도 아니었다. 사람은 안 하던 일도 다양하게 해봐야 자기 자신을 정확하게 알 수 있다.

또 놀랐던 건 내가 생각보다 허리가 유연하다는 점이다. 앞으로 굽히는 데도, 뒤로 굽히는 데도. 몸을 뒤로 젖혀 아치 형태를 만드는 자세를 ‘차크라’라 하는데, 그걸 그렇게 빨리(내 관점에서!) 해낼 줄 몰랐다. 읏차! 비명 같은 기합과 함께 몸을 들어 올리는 데 성공하자, 목청 크고 와일드한 선생님은 할렐루야!를 외치며 축하해주었다.

가장 흥미로운 건 아픔에 대한 내 마음과 몸의 반응이다. 뭉친 근육, 굳은 관절을 풀자면 아프지 않을 수 없다. 느닷없이 닥치는 아픔이 아니라 예견된 아픔, 심지어 내가 자초하는 아픔이다. 아프지 말자, 살살 하자와 제대로 하자, 아파도 참자 사이에서 마음은 주로 뒤로 물러선다. 짐짓 숨을 몰아쉬고 얼굴을 찡그리며 자세를 허물어버린다. 그러다 선생님 눈길이 닿는다 싶으면 다시 힘을 준다. 그런데 몸은 그러는 중에도 조금씩 앞으로 나아간다. 어제 안 잡히던 발이 오늘은 잡힌다. 이쯤에서 포기하던 동작이 좀 더 지속된다. 그러니까 나약하고 비겁한 마음을 몸이 끌고 나아간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픔을 무릅쓰고, 마음을 용서해가면서. 그런 몸을 지켜보며 그 역할을 새삼 깨닫는다.

정신에 비해 상대적으로 열등한 취급을 받는 몸, 수동적인 도구로만 여겨지며 왜곡되는 몸. 마음을 주도적으로 끌어갈 수 있는 몸의 힘을 무시하면 안 된다. 정신세계만큼 몸 세계도 건강하고 풍요롭게 넓혀야 한다. 여기에 몸은 없다!를 외치는 듯한 우리 교육제도까지 언급하면, 과한 걸까?

김서정(동화작가·평론가), 그래픽=공희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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