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윤고은] 발통역



삿포로에서 돌아오던 비행기 안이었다. 나는 3-3 배열 좌석의 복도 쪽에 앉아 있었고, C가 가운데, 그리고 창가 쪽엔 모르는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이 “저기요” 하고 말을 걸어오기 전까진 한국인인 줄만 알았다. 그녀는 세관신고서를 보여주며 좀 설명해줄 수 있느냐고 했다. 일본인이고 한국말을 조금 할 줄 아는데, 이 서류의 말들이 어렵다면서 말이다. 이미 반쯤 썼고 몇 부분만 하면 된다는 거였다. 세관에 신고할 만한 게 있는지를 표시하는 항목들이었다. 나는 ‘없음’ 표시를 가리키면서 “여기에 다 체크하면 돼요”라고 말했는데, 말해놓고도 뭔가 미진한 느낌이 들었다. 어쩌면 저 사람이 원하는 건 이런 게 아니라 서류 속 문장에 대한 보다 정확한 이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일본어나 영어 버전의 신고서를 두고 굳이 한국어로 된 서류를 고집하는 거라면 이유가 있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게다가 저 사람이 정말 신고할 게 없는지 내가 어떻게 판단한단 말인가? 결국 그녀와 함께 세관신고서를 보게 됐다. 섬세하게 한 줄씩 해석을 돕겠다는 마음으로.

그녀는 내가 한국어를 잘하는 줄 알았고 나도 그런 줄 알았지만, 사실이 아니라는 게 곧 밝혀졌다. 그러니까 ‘FTA 협정 국가의 원산지 물품으로 특혜 관세를 적용받고자 하는 물품’이라든지 ‘총포류, 도검류, 마약류, 국헌·공안·풍속저해물품 등 우리나라에 반입이 금지되거나 제한되는 물품’에 대해서 전달하느라 난 점점 무례한 바보가 되어갔다. “총을 가지고 있어요?”, “필로폰이나 헤로인 같은 거 있어요?” 한국어에 대한 이해나 신고의 선택권 같은 취지는 이미 증발했고, 구체적으로 물어볼수록 좀 이상한 질문들만 남게 됐다. 그 즈음 졸고 있던 C가 눈을 떴고, C는 내가 ‘미화로 환산하여 1만 불을 초과하는 지급수단’을 설명하기 위해 이런 질문을 던지는 걸 보게 됐다. “돈 얼마 갖고 왔어요? 돈 많아요?” 나중에는 정말 멍청이 상태가 되어 “불법을 저질렀어요?” 이런 말을 던지는 것도. C는 서둘러 다시 눈을 감았다.

글=윤고은(소설가), 삽화=공희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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