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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와의 만남] 곤고한 날에 펼쳐보고 삶을 감사로 채우자

김병종 서울대 미대 명예교수의 호는 단아(旦兒)이다. ‘새벽의 아이’답게 김 교수는 매일 새벽 화실로 향한다. 사진은 캔버스 앞에 선 김 교수. 너와숲 제공







 
서울 사랑의교회 예배당 지하 4층 복도에 전시된 길이 55m의 대형 작품 ‘바람이 임의로 불매-송화분분’ 전경. 관람자는 긴 복도를 따라 걸으며 옷깃을 여미고 그림을 감상하게 된다. 너와숲 제공


그림이 주인이고 글은 종이다. 새벽부터 화실에 들어가 마치 검투사처럼 붓을 든다. 혈관 속 도파민의 분출을 느끼며 캔버스 앞에서 작업하다 보면 해 질 무렵에야 화실을 나서게 된다.

그림이 막힐 땐 펜을 들고 글을 쓴다. 컴퓨터 자판이 아닌 A4 백지에 휘날리듯 써 내려간 글이 모이고 모여 지난해 5권의 책이 됐다. ‘문학과 미술로 지은 집 한 채를 꿈꾸는’ 우리 시대 글 쓰는 화백, 김병종(69) 서울대 명예교수 겸 가천대 석좌교수가 주인공이다.

지난해 12월 ‘내 영혼을 만지고 간 책들’(너와숲)을 펴낸 김 교수를 지난 3일 경기도 과천 송와(松窩)미술관에서 만났다. 이름 그대로 관악산 줄기 오래된 소나무로 둘러싸인 장소였다. 40년 넘게 서울대 미술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친 김 교수는 이곳에서 글을 쓰고 대학원생들과 세미나를 해왔다. 그림을 그리는 화실은 따로 있다고 했다. 인터뷰 직전까지 인근 화실에서 작업하다 온 김 교수의 소매 아래로 하얀색 물감이 묻어 있었다. 김 교수는 대표작 ‘바보 예수-엘리엘리라마사박다니’(1985)가 그려진 책의 표지를 보며 이렇게 말했다.

“저는 평소 스스로 영적 지진아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때문에 다른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저 자신의 영적 성장에 도움이 될 만한 책들을 읽고 그 느낌을 적어 본 것이 바로 ‘내 영혼을 만지고 간 책들’입니다. 이 가운데 많은 책이 국민일보에 연재했던 ‘내 영혼의 책갈피’에 소개된 것입니다. ‘곤고한 날에는 이 책을 본다’가 부제입니다.”

지진아란 표현은 겸양의 말이다. 책 전체가 기독교 고전을 관통하고 있다. 책은 ‘내 어머니의 당부’로 시작한다. “아들아! 네게 당부한다. 말씀을 읽고 기도하는 일을 결코 소홀히 하지 말아라. 하나님의 섭리는 오묘하시다. 고난도 축복이니 고난 중에는 오히려 기도하고 기도 후에는 감사하라. 네 삶을 감사로 채워라.” 2남 3녀의 막내였던 김 교수는 어머니를 향해 “유대교 랍비처럼 강고했던 분”이라며 “그분으로부터 가급적 멀리 도망치고 싶었지만 결국은 그 원심력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다”고 밝혔다.

책의 첫 번째 장은 소설가 최인훈의 1959년 자유문학 등단작 ‘라울전’을 다룬다. 가말리엘 문하의 사울과 동문수학하고 평생 그를 의식했던 라울의 이야기다. 야망으로 이글대던 열혈 청년 사울이 하찮은 소문으로 여기던 나사렛 예수를 뒤늦게 접한 후 바울로 다시 태어나 이글거리던 눈에 한없는 사랑과 자애로움이 담긴 것을 목격하게 된다. 모차르트의 재능에 괴로워했던 살리에리 이야기의 영화 ‘아마데우스’보다 더 드라마틱하다. 김 교수는 “‘라울전’은 김동리의 ‘사반의 십자가’와 함께 한국 기독교 문학의 두 기둥으로 꼽을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CS 루이스의 ‘순전한 기독교’를 읽고 “여기 하나의 정신이 있다”고 말한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을 통해서는 “자유, 버리면 얻으리라”고 소개한다. 김 교수는 특히 하은(霞隱) 전성천 박사의 회고록 ‘십자가 그늘에서’를 소개하며 “광주대단지 사건에 뛰어들어 온 힘을 다해 사태를 수습하며 증오와 갈등 위에 하나님의 교회를 세운 인물”이라고 기억한다.

김병종 그림 산문집 ‘칠집 김씨 사람을 그리다’와 여행 산문집 ‘거기서 나는 죽어도 좋았다’ 역시 그의 전집을 계획 중인 출판사 너와숲에서 지난해 발간됐다.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와 나눈 생명 대담집도 출간을 앞두고 있다. 프랑스 파리와 미국 뉴욕을 다룬 ‘시화기행’ 1~2권은 지난해 출판사 문학동네에서 펴냈고, 올해 3편 아일랜드와 4편 이탈리아가 각각 예정돼 있다. 김 교수는 “그림은 밥이고 글은 반찬인데, 글을 많이 썼다는 건 그만큼 그림도 열심히 그렸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김 교수는 지난해 55m에 이르는 초대형 작품 ‘바람이 임의로 불매-송화분분’을 완성했다. 서울 서초구 사랑의교회(오정현 목사) 예배당 지하 4층 복도에 가면 누구나 관람할 수 있다. 오정현 목사는 그림이 걸린 곳을 ‘기도와 묵상의 길’로 부르며 “홀로 고요한 시간에 기도와 묵상을 하며 걷는 길이 되기를 소망한다”고 밝혔다. 이어령 초대 문화부장관은 이 그림을 두고 “김병종이 지금까지 생명 밖에서 생명을 노래했다면 ‘송화분분’에서는 생명의 바다에 뛰어들어 스스로 흘러가는 송홧가루가 되고자 했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사람들이 버스나 지하철에서 내려 우르르 예배당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창조주를 예배하러 가기 위해 옷깃을 여밀 만한 준비와 여유 공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옛날 어머니와 손잡고 들길을 걸어 교회에 갔던 일을 떠올리며 제작했다”고 설명했다.

“사랑의교회에선 성화가 아니어도 좋다고 양해해 주었습니다. 지하 4층 그 넓은 공간을 비우고 기다려 주었습니다. 예술과 문화에 대한 감식안이 남다른 교회입니다. 콘크리트 건물에 오솔길을 하나 내자고 생각했습니다. 생전의 이어령 선생은 송화분분 연작을 향해 바람이 불어오는 근원을 생각하게 한다고 평했습니다. 창조가 시작되는 지점입니다.”

‘바보 예수’ 등 다른 작품은 전북 남원시립김병종미술관에서 만날 수 있다. 남원은 김 교수의 고향이다. 어르신들은 여전히 광한루와 춘향이를 찾지만, 젊은이들은 미술관에서 생명을 만난다. 미술관은 지난해에만 관람객 10만명이 다녀갔다고 밝혔다.

과천=우성규 기자 mainport@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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