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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두상달 (6) 위기가 기회 된 모험과 도전… 종합상사로 급성장
두상달 장로가 1983년 사업차 쿠웨이트를 방문해 아내 김영숙(가운데) 권사와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꿈 많은 대학 신입생 시절, 아직 예수를 믿지 않을 때 염리동 자취방에서 룸메이트가 자주 암송하던 영어 구절이 있었다. “더 로드 이즈 마이 쉐퍼드, 아이 쉘 낫 원트(The Lord is my shepherd, I shall not want)”. 내용도 모르고 친구 따라 외우게 됐고 그때부터 늘 입가를 맴돌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어머니는 세상을 떠나셨다. 어머니는 막내인 나를 두고 눈을 감을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손을 꼭 잡고서 “상달아 집을 ...
입력:2021-08-17 03:10:02
[역경의 열매] 두상달 (5) 고연전 축구 중계에 정신 팔려 아내와 첫 데이트 폭망
두상달 장로와 김영숙 권사가 1969년 서울 종로 태화관에서 결혼식 후 친구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맨 앞줄 왼쪽 세 번째와 맨 뒷줄 왼쪽 네 번째가 각각 홍정길, 하용조 목사. 첫 회사는 충무로 한일빌딩 10층에 있었다. 바쁘게 직장생활을 하던 중 CCC 간사로 활동하던 친구 강용원이 “같은 건물 2층에 근무하는 김영숙씨 만나 볼래? 둘 다 CCC 회원이라 잘 통할 것 같다”며 데이트를 권했다. 이야기를 듣고 보니 안면이 있는 회원이었다. 미래의 아내가 될 김영숙은 이화여대 약대를 졸업한 약사로 영진약품에 다니고 있었다. 여러모로 인연이 겹...
입력:2021-08-16 03:05:03
[역경의 열매] 두상달 (4) 눈앞 수입보다 사회생활 선택… 도전은 축복의 여정
두상달 장로가 1970년대 초 칠성산업을 시작한 직후 사무실에서 업무를 보고 있다. 1960년대를 관통하는 단어는 가난이었다. 우리나라는 전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였다. 61년 5·16 직후 혁명 구호 1호가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한다”였을 정도였다. 명문대학을 졸업해도 제대로 된 일자리를 구하는 게 쉽질 않았다. 당시는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진학하려면 모두 입학시험을 봐야 했다. 대학생 과외교사가 인기 있었던 이유였다. 대학 입학 직후 한 지인의 소개로 종로에 살던 한 아이를 만난 게 과외교사의 ...
입력:2021-08-13 03:10:02
[역경의 열매] 두상달 (3) 뜨거운 복음 메시지에 매료 “주를 위해 살겠습니다”
CCC를 설립한 김준곤 목사가 1960년대 대학생 회원들 앞에서 민족복음화의 비전을 선포하고 있다. 대학 2학년 때로 기억한다. 한 친구가 강의실에 들어가던 날 붙잡았다. “상달아. CCC라는 데가 있거든.” “뭐 하는 데야?” “무슨 선교회인데.” “나 교회 안 다닌다.” “거기에 여학생들이 많단다. 가보자.” 청춘에게 무슨 설명이 더 필요했겠는가. 여학생들이 많다는 친구의 말 한마디로 모든 경계가 무너졌다. 그날부터 여자친구를 사귀겠다는 일념만으로 명동 거리 한구석에 있던 CCC, 한국대학...
입력:2021-08-12 03:05:03
[역경의 열매] 두상달 (2) “잘 썼다” 선생님 칭찬에 멀리하던 공부 재미 붙여
학업 성취도와 태도 모두 ‘불양(불량)’하다고 적혀 있는 두상달 장로의 초등학교 성적표. 오른쪽은 공부에 취미를 붙였던 중학교 때 성적표로 전 과목이 ‘수’다. 사랑만 받으며 살던 막내였다. 하지만 공부에는 영 취미가 없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는 두 달 동안 학교에 가지 않은 적도 있었다. 여기저기 다니며 놀다 이웃 아주머니에게 들켜 사달이 났다. 형들이 학교에 가지 않았다고 나를 혼냈다. 그때 어머니가 “한 놈은 공부 안 해도 괜찮다. 상달이 괴롭히지 말고 내버려 두어라”고 하시며 내 편을 들어 주셨다. 천군만마까...
입력:2021-08-11 03:05:04
[역경의 열매] 두상달 (1) 어머니께 받은 사랑이 ‘복음의 멀티플레이어’ 원동력
두상달 서울 반포교회 원로장로가 지난달 27일 서울 강남구 가정문화원에서 자신의 삶과 신앙의 여정을 설명하고 있다. 강민석 선임기자 1939년 전북 김제 광활면에서 태어났다. 고향 마을은 벽촌 중에서도 벽촌으로 바다를 막아 만든 거친 땅이었다. 지금도 서쪽으로 18㎞쯤 가면 새만금방조제가 나온다. 광활면 일대가 원래 모두 바다였던 셈이다. 일제강점기, 변두리 어촌 마을 사람들의 일상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이미 다섯 남매를 둔 어머니 문주복 여사는 무려 44세에 날 가지셨다. 지금도 40대 중반이면 노산이라 하는데 그때는 말해 뭣하랴. 평균 수명이 40...
입력:2021-08-10 03:05: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