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두상달 (5) 고연전 축구 중계에 정신 팔려 아내와 첫 데이트 폭망

두상달 장로와 김영숙 권사가 1969년 서울 종로 태화관에서 결혼식 후 친구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맨 앞줄 왼쪽 세 번째와 맨 뒷줄 왼쪽 네 번째가 각각 홍정길, 하용조 목사.


첫 회사는 충무로 한일빌딩 10층에 있었다. 바쁘게 직장생활을 하던 중 CCC 간사로 활동하던 친구 강용원이 “같은 건물 2층에 근무하는 김영숙씨 만나 볼래? 둘 다 CCC 회원이라 잘 통할 것 같다”며 데이트를 권했다. 이야기를 듣고 보니 안면이 있는 회원이었다.

미래의 아내가 될 김영숙은 이화여대 약대를 졸업한 약사로 영진약품에 다니고 있었다. 여러모로 인연이 겹친다는 생각이 들어 데이트를 신청했다. 1967년의 일이었다. 회사 근처의 다방에서 만났는데 첫인상이 너무 좋았다. 하지만 마침 그날 정기 고연전 축구 경기 중계가 있었다. ‘다른 날 만났으면 오늘 경기장에서 축구 봤을 텐데’라는 생각이 들면서 정신이 반쯤 축구 중계에 빠져 버렸다.

이런 날 보고 아내는 적잖이 실망했던 것 같다. 헤어질 때 “다시 만나자”고 말했지만 “바쁘다”는 차가운 답이 돌아왔다. 첫 데이트가 이토록 싱겁게 끝나고 무려 1년이 지났다. 물론 회사가 같은 건물에 있다 보니 로비에서 우연히 마주쳤던 일도 적지 않았다. 우리의 사연을 알게 된 CCC 친구들이 다시 만나보라고 권했고 결국 다시 만났다.

사실 나나 아내나 결혼할 나이가 꽉 찼다. 결혼을 염두에 두고 만났더니 서로 전기가 통했다. 무엇이든 마음이 동해야 통하는 법이다. 우리는 점심시간마다 만나 눈 덮인 덕수궁과 남산을 걸으며 사랑을 키웠다. 68년 10월에 다시 만나 이듬해 3월 종로구 태화관에서 김준곤 목사님의 주례로 결혼을 했다.

CCC 활동을 함께 했던 아내와는 언어와 생각, 비전이 통했다. 결혼 전 아내는 “나를 버려도 주님은 버리지 않으실 거죠”라고 물었다. 여러 의미를 담고 있는 질문이었다. 내가 주님을 버릴 일이 없다는 걸 너무 잘 아는 아내가 둘 다 절대 버리지 말라는 다짐을 받기 위해 물어본 것이었다. 지혜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심 결혼한 뒤 아내가 약사로 일하면 생활이 안정적일 거로 기대했다. 하지만 아내는 일생 약국을 해 본 일이 없다. “여보. 나는 당신이 약사로 일할 줄 알았지”라고 하면 “그래요? 나는 신약과 양약을 처방하지 않고 신약과 구약으로 처방을 바꿨을 뿐이에요”라고 답한다. 우문현답이다.

아내는 실제 다른 처방으로 사람을 살렸다. 36년 동안 안양교도소를 찾아 재소자들에게 성경과 한글, 영어를 가르치고 섬기고 봉사를 했다. 수십년 교도소를 들락거린 최장기수라고 농담을 하기도 한다. 아내는 이 일로 국민훈장 포상까지 받았다.

신앙 안에서 아내와 만난 것은 기막힌 연분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부부가 그렇듯 행복하지만은 않았다. 의견 차이로 갈등하기도 하고 속상해 눈물지을 때도 있었다. 달라도 너무 달라 대화가 통하지 않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우리 부부의 이런 경험은 훗날 부부들에게 희망을 선물하는 강사가 되는 큰 자양분이 됐다. 또 강의의 좋은 소재가 됐다. 갈등이 사랑을 키웠고 우리 부부가 겪은 어려움이 다른 부부의 아픔을 위로하고 치료하는 특효약이 된 것이다.

정리=장창일 기자 jangci@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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