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윤고은] 동전 한 닢



마르탱파주의 소설 ‘완벽한 하루’에는 에밀리 디킨슨의 시집을 사는데 수입의 대부분을 쓰는 독자가 나온다. 전 지구인이 읽게 하는 것이 그의 목표여서 매달 꾸준히 책을 사고 여기저기 몰래 뿌리는 행위를 계속한다. 나는 아직 그런 독자를 만나지 못했으므로, 어쩌면 내 책을 가장 많이 산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일지도 모른다. 책을 낼 때마다 발송 목록을 최소화하고 있지만, 내게 책을 보내준 분께는 나도 보내야 하니 적어도 오십 권은 사게 된다. 출판사에서 책을 발송하기도 하지만, 간혹 내가 우체국서 부쳐야 하는 경우도 생긴다. 언젠가 한번은 책 오십 권을 들고 우체국으로 걸어간 적이 있는데, 돌아보면 그건 정답이 아니었다. 오십 권이 동시에 우체국으로 이동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조금씩 나눠서 보내도 되고, 방문 택배를 신청할 수도 있었을 테고, 택시를 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종종 나는 이해 못할 선택을 하고 그 선택에 어떤 의심조차 하지 못해서, 책 오십 권을 들고 나오면서도 꽤 산뜻한 기분이었다.

우체국은 도보 15분 거리에 있었는데, 100m쯤 걷고서야 내가 들고 있는 게 어떤 ‘짐’이라는 인식을 했고, 책 오십 권의 무게가 얼마인지를 계산해보게 됐다. 게다가 지금 걷는 길은 우체국까지의 최단 경로가 아니라, 단지 가장 예쁜 길이라는 사실도 깨달았다. 평소 습관대로 접어든 거였다. 바퀴 달린 가방을 이용할 걸 그랬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니면 튼튼한 어깨끈이 있는 배낭이라도. 가장 최악의 경우가 노끈 같은 손잡이의 쇼핑백이었는데, 하필 내가 그걸 들고 있었다. 멈춰서서 손바닥을 확인해보니 이미 쇼핑백 두 개가 손바닥 위에 채찍 자국을 남겨놓고 있었다. 스스로의 무계획에 짜증이 있는 대로 치솟았을 즈음, 뭔가 반짝거리는 게 눈에 들어왔다. 발아래에 오백 원 동전 하나가 있었다. 그건 마치 반짝거리는 쉼표 같았다. 동전이 출몰한 타이밍이 적확해서, 그게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동전이라는 게 좋아서, 나는 빠른 속도로 뭔가를 회복하기 시작했다. 룰루랄라 산책로를 걸어, 책을 운반하는 노동자의 기분을.

윤고은(소설가), 그래픽=공희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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