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윤고은] 줄서기의 달인



나는 ‘생활의 달인’이라는 TV 프로그램을 좋아하지만, 매번 챙겨보지는 않는다. 페이스 조절 때문이다. 방송을 보고 나면, 결국 달인의 가게에 가서 줄을 서게 되니 말이다. 원고 마감을 하지 못한 채 달인의 베이글이나 크루아상을 먹기 위해 줄을 선 적이 꽤 있다. 편집자를 여기서 만나지는 않겠지, 마음 졸이면서. 아마도 몇 주 후엔 홍성의 어느 호떡집 앞에 가 있을 것이다. 방송일로부터 몇 주의 간격을 두고 가는 건 오래 기다리지 않기 위한 요령인데, 나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지 몇 달 후에 가도 인파 속에 묻히는 경우가 꽤 있다.

달인의 가게 앞에 당도하기 전까지 확고했던 나의 추진력은 대기 인원의 규모에 따라 쉽게 무너진다. 간혹 압도적인 ‘이줄망’(이번 줄은 망했어)을 보여주는 광경들이 있다. 그럴 때는 과감히 돌아서야 한다. 내 마지노선은 한 시간이다. 그나마 한 시간을 기다릴 수 있는 건 조력자가 있기 때문이다. L은 내가 “이미 글렀어”를 외칠 때마다 나를 줄에 세워두고는 냉큼 편의점에 가서 뭔가를 사온다. 배가 통통한 바나나우유 같은 것. L은 빨대 하나를 내 입에 물려놓고는, 줄이 엄청 빠른 속도로 줄어들고 있다고 중계한다. 중계할 것은 많다. 기다림을 포기하기도 하고(저기 앞에 두 명 나갔어!) 벤치마킹하기도 하고(저기도 편의점 다녀왔네!) 메뉴 하나가 마감되었다는 말에 폭발하기도 하고(싸우나봐! 저 아저씨 욕했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기다린다.(저 사람 들고 나온다!)

여기에 오자고 한 건 물론 나였다. 그러나 이렇게까지 열심히 할 생각은 없었단 말이다. 그러니까 이렇게까지 열심히 기다릴 생각은! L은 칭얼거리는 동행에게 이렇게 말해준다. “어차피 줄은 다 줄어들게 돼 있어.” 이쯤 되면 L은 줄서기의 달인이다. 그의 말은 사실이긴 하다. 긴 줄 속의 점 하나가 되어 있으면, 결국은 내 차례가 오니까. 그건 뭔가 안심이 되는 시스템 아닌가. 언젠가는 내 차례가 온다는 사실, 그 정직한 룰이 가볍게 무시되기도 하는 세상이니 말이다.

글=윤고은(소설가), 삽화=전진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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