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김태용] 닦기의 기술



평창 동계올림픽이 시작됐다. 개막식 전날부터 집중해 보는 경기가 있는데 바로 컬링이다. 겉보기에는 스피드와 화려함이 없어 보이지만 경기 규칙과 선수들의 몸놀림을 보고 있으면 어느새 웃음이 터지고 탄성을 지르게 된다. 마치 반복적인 말과 행위를 통해 웃픈 현실을 풍자하는 부조리극처럼 보이기도 한다. 스톤, 브룸, 페블, 스위핑 등의 용어들을 듣고 있으면 정말 부조리극의 대가인 사무엘 베케트의 글에 나오는 단어들 같다. 돌, 빗자루, 자갈, 쓸기라니 바로 우리 일상의 언어들 아닌가. 그리고 스톤을 위치시켜야 할 원형의 자리는 하우스다. 상당한 작전 능력이 필요하고 경우의 수가 많아 ‘빙판의 체스’라고 불리기도 한다는데 스톤이 빙판에 미끄러지면서 들려오는 선수들의 코칭 소리 또한 놀이에 흥분된 아이들의 재잘거림과 외침처럼 들려 경기의 재미를 배가시킨다. 무엇보다 스톤이 가는 길을 만들어내고 상대편의 스톤을 밀어내기 위한 스위핑이 압권인데 보기에는 우스꽝스럽지만 선수들에게는 상당한 체력과 예리함이 필요한 기술이다. 열심히 스위핑하는 선수를 보고 해설자는 ‘컬링은 스위핑이죠’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쓸기보다는 닦기에 가까운 컬링의 스위핑을 보면서 계속 닦기라는 말이 입에 붙어 처음 언어를 배우는 아이처럼 닦는 행위에 집중하게 됐다. 이를 닦고, 바닥을 닦고, 접시를 닦고, 구두를 닦고, 창문을 닦는 일상의 행위 속에서 가장 본질적인 닦기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눈물을 닦는 행위일 것이다. 우리가 태어나 처음 보는 것은 엄마가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고, 누군가 우리의 눈물을 닦아주는 것으로 피부의 첫 접촉을 느끼기도 한다. 베케트의 희곡 ‘엔드게임(Endgame)’에는 이런 대화가 나온다. “그는 뭘 하고 있지?” “울고 있어요.” “그렇다면 살아 있군.” 이번 올림픽에도 많은 눈물이 보일 것이다. 더불어 올림픽을 즐길 수 없는 사람들의 눈물도 여전히 흐르고 있을 것이다. 저마다 다른 닦기의 기술로 우리는 일상을 살아간다. 하지만 눈물을 닦는 기술은 같을 것이다.

김태용(소설가)

삽화=전진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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