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김서정] 돌아온다 1



거의 일주일 폭설로 제주가 마비되다시피 한 때였다. 한라산을 넘는 도로는 일찌감치 통제되었다. 그 길을 활보하던 나는 제주대 앞 사거리에서 딱한 장면을 보게 되었다. 조그만 승합차 하나가 우회전을 하다가 눈 쌓인 길을 구별 못해 차도 대신 인도로 올라선 것이었다. 앞으로도 뒤로도 못 가고 헛바퀴만 맹렬하게 돌리는 차를 한 청년이 끙끙대며 밀고 있었다. 나는 달려들어 손을 보탰지만, 넘어지기만 했을 뿐 힘이 되지는 못했다.

차에는 두 청년이 있었는데, 편의상 하나는 동글이, 하나는 길쭉이라고 부르자. 운전하던 동글이는 자기가 밀 테니 나더러 액셀을 밟아 달라고 부탁한다. 길쭉이는 깜짝 놀라 얼른 자기가 운전석으로 올라간다. 다시 밀어보지만 타이어 타는 냄새만 짙어진다. 두리번거리던 내 눈에 저쪽 하얀 눈 더미 아래 뭔가 파란 게 살짝 눈에 띈다. 모래주머니다! 모래주머니로 인도와 차도 사이 턱에 슬로프를 만들자는 제안에 동글이가 반색을 한다. 길쭉이가 뒤에서 “모래” “후진” 같은 말을 중얼거리지만 주머니 나르기에 신이 난 나와 동글이의 귀에는 그냥 스쳐 지나간다. 수십 개의 주머니를 쌓아 길을 내고 다시 뒤에서 힘껏 밀어 드디어 차는 차도로 내려서는 데 성공한다. 만세!

모래주머니를 다시 가져다놓으려는 나를 동글이가 만류한다. 뒤처리는 저희가 할게요. 그래서 돌아서려는데 한마디 보탠다. 너무 감사한데, 저기, 상품권이라도…. 음? 상품권? 0.5초 흔들린 마음을 다잡고 점잖게 사양하며 의례적인 답사를 한다. 다른 사람 도와주시면 되죠. 그 도움이 돌아서 저한테 올 거예요. 그리고 다시 길을 가며 살짝 섭섭한 마음을 달랜다. 상품권, 뭐, 꼭 받고 싶다기보다는, 무슨 상품권인지 조금 궁금할 뿐이야. 그렇지? 그러다가 “모래” “후진”이 무슨 뜻인지를 불현듯 깨닫고 이마를 친다. 이런 바보. 모래 뿌려서 후진했으면 일이 훨씬 쉬웠잖아! 넘어져도 재미있고, 바보였어도 유쾌한 하루였다. 의례적인 답사가 현실이 될 날이 코앞에 있었다는 사실을 그때는 몰랐다.

김서정(동화작가·평론가)

삽화=전진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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