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윤고은] 상냥한 취객



언젠가 P는 중간에 똑떨어진 맥주를 사기 위해 집 근처 슈퍼마켓으로 갔다. 계산대의 김선희 아주머니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했다. 술기운이 아니었다면 인사를 건네지 못했을 것이다. 좀 쑥스러웠지만 평소 감사했던 마음을 그 순간 꼭 전하고 싶었다. 평소 뭐가 감사했는데? 내가 묻자 P가 말했다. “이거 1+1이니까 한 개 더 가져오시라, 5만 원 이상 구입하면 2000포인트 추가다, 이런 거 말씀해 주셨거든요.” 겨우 그걸로? 고개를 갸우뚱하는 내게 P는 몇 장면을 더 소개했다. “항상 밝으셔서 기분이 좋고요. 취객을 달래서 내보내시는 것도 봤고, 계산할 때도 배려해 주세요. 바코드를 찍고서 제품을 옆으로 밀 때 받는 사람 생각해서 하시고요.” 계산할 때 받는 사람을 배려한다는 게 어떤 거냐고 물으니 P는 구체적인 설명을 했다. 이를테면 “앞사람이 대파나 열무처럼 흙이 떨어지는 걸 샀을 때, 흙 묻은 계산대 위에 다음 사람 우유를 눕혀서 쓱 미는 분들도 있거든요. 그럼 우유가 더러워지잖아요. 이분은 그런 걸 고려해요. 그러니까 디테일이 달라요, 다른 분이랑.”

그 디테일이 쌓여서 어느 밤 누군가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다. 동네 사람들과 말을 주고받을 일이 별로 없는 요즘, 동네 산책자 P는 취기를 빌려 고백한다. 물론 고백한다고 늘 사이가 돈독해지는 건 아니다. P는 와인을 좀 마시고 편의점에 갔다가 계산이 느린 알바생 때문에 사람들이 투덜거리는 걸 들었다. 줄이 천천히 줄고 마침내 자기 차례가 되었을 때 P는 말했다. “천천히 하세요, 괜찮아요.” 그리고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말을 덧붙였다. “편의점 일은 처음이세요?” 알바생은 제대한 지 나흘째라고 했다. P는 그의 디테일에 몰입하게 됐고 결국 이렇게 묻기에 이르렀다. “할 만하세요?” 알바생은 그렇다고 했지만, 질문을 던진 이는 뒤늦게 ‘할 만하세요’를 곱씹으며 다소 이상한 질문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할 만하시냐는 그 말 좀 이상하지 않아요?” P는 상냥한 취객이 내뱉은 말에 대해 민망해하다가, 결국 편의점을 피해 가는 코스로 산책로를 대폭 수정했다.

윤고은(소설가)

그래픽=공희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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