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김태용] 불안의 책들



가끔 글이 안 써지거나, 멍해질 때, 혹은 잠이 들기 전에 문학점(占)을 칠 때가 있다. 문학점이라는 것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우연히 책을 펼쳐 첫눈에 들어오는 문장을 읽고 글쓰기의 영감을 받거나 그날의 명언으로 생각하게 된다. 팔괘와 오행 등을 따지는 수학적이고 신비한 점괘를 기대할 수는 없지만, 카드 뒤집기나 쌀알 던지기 등의 우연처럼 문학점을 칠 수 있는 책은 여러 가지다. 성경과 동서양 고전들이 될 수도 있고, 여행책, 요리책도 가능할 수 있을 것이다. 나에게도 몇 권의 책들이 있는데 그중의 하나가 ‘페드난두 페소아’의 ‘불안의 책’이다.

포르투갈의 대표 작가인 페소아는 문학의 역사에서 가장 많은 가명을 사용한 작가로 알려졌다. 70개가 넘는 다른 이름으로 작품을 발표하거나 글을 썼다. ‘양떼지기’라는 시집은 ‘알베르투 카에이루’라는 이름으로, 앞서 소개한 ‘불안의 책’은 ‘베르나르두 소아르스’라는 가상의 작가가 쓴 단상들의 모음이다. 사후에 그의 집에서 발견된 트렁크에서는 엄청난 분량의 미발표 원고가 나왔고, 아직도 분류와 출판 작업이 이어지고 있다. 작가가 된다는 것은 세상의 불안이 스며든 자아가 다른 삶을 꿈꾸는 과정을 언어로 보여주는 것일 텐데, 페소아의 이름들과 ‘불안의 책’은 우리에게 다른 삶을 원하고, 원해야만 한다고 주문을 걸고 있다.

인류의 역사가 시작됐을 때부터 불안은 우리의 영혼을 잠식해 있었고, 가끔 어떤 운과 점괘에 삶을 맡기곤 했다. 다소 모호한 글쓰기로 인해 번역자에 따라 해석이 미묘하게 달라지는 ‘불안의 책’은 국내에도 다른 역자의 책들이 몇 권 나와 있다. 최근에 한 친구로부터 다른 책을 선물 받고, 동네의 헌책방에서 또 다른 책을 구입했다. 그렇게 같으면서 다른 ‘불안의 책’을 세 권 갖게 됐다. 이 글을 쓰는 지금 불안의 책들을 펼쳐 얻은 문학점은 다음과 같다. “오 서글픈 행운이여!” “나는 지루함이 사람이 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몸을 씻듯 운명도 씻어주고, 옷을 갈아입듯 삶도 갈아줘야 한다.”

김태용(소설가·서울예대 교수)

삽화=공희정 기자
 
트위터 페이스북 구글플러스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