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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건강] 대물림되는 고통… 건보기준 안 맞아 치료 사각지대 많다

미국 심장학회(ACA)가 발행하는 계간지 2015년 특별판에 게재된 ‘가족성 고콜레스테롤혈증의 비극적 진실’에 삽입된 이미지. 가족 간에 대를 이어 유전되며 적절한 치료가 이뤄지지 않으면 치명적인 심혈관질환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미국 심장학회 제공


가족성 고지혈증이 있으면 검은 눈동자 주변에 콜레스테롤이 쌓여 하얀 띠 형태로 보이거나(왼쪽), 발뒤꿈치 등 인체 접히는 부위에 혹 같은 황색종이 생기기도 한다. 서울아산병원 제공


심하면 젊은 나이에 급사 위험도
추정 환자 10만명 중 296명 등록
건보 안 되면 신약값만 월 25만원
한국인에게 맞는 기준 마련 시급

A씨(39)는 3년 전 급성 심근경색으로 응급실에 실려간 아찔한 경험이 있다. 긴급하게 스텐트(금속망)를 넣어 막힌 심장혈관을 뚫는 시술을 받고 간신히 위기를 넘겼다. 30대에 심근경색은 흔치 않은 일이다. 당시 혈액검사에서 총콜레스테롤 수치가 310㎎/㎗로 정상 기준(240㎎/㎗ 미만)을 훌쩍 넘었고 '나쁜 콜레스테롤'로 불리는 저밀도지단백(LDL)콜레스테롤도 181㎎/㎗로 정상(130㎎/㎗ 미만)보다 높았다. 평소 기름진 음식을 즐기지 않고 운동도 꾸준히 해 건강에 자신이 있었던 터라 충격이 컸다. 유전자검사 결과 간에서 LDL콜레스테롤 배출을 조절하는 '유전자(LDLR) 변이'가 확인됐다.

피 속에 기름기(지질)가 많은 고콜레스테롤혈증(고지혈증)은 육류나 지방질 섭취가 많은 50대 이후 흔히 나타나지만 A씨처럼 젊은 나이에도 초고위험 수준을 보이는 경우가 있다. 바로 높은 콜레스테롤 수치가 대물림되는 ‘가족성 고지혈증(FH)’이다.

인구 500~1000명 당 1명꼴로 발생해 국내에 10만명 안팎의 환자가 있는 걸로 추정된다. 부모의 한쪽으로부터 변이 유전자를 물려받는 ‘이형 접합’ 유형이 대부분이며 양쪽에서 이상 유전자를 물려받는 ‘동형 접합’ 유형은 드물게 보고된다. 따라서 가족 가운데 이 질환을 진단받으면 부모, 형제, 자녀 전체가 혈액 및 유전자 검사를 받아볼 필요가 있다.

심혈관질환 고위험군

문제는 자신이 가족성 고지혈증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가 심근경색이나 뇌졸중 등으로 갑자기 쓰러진 후에야 인지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점이다. 학계는 진단과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한 채 ‘숨어있는’ 환자들이 더 많을 것으로 보고 있다.

실제 한국지질·동맥경화학회가 2018년부터 FH 환자 등록사업을 벌였지만 지난해까지 296명만이 등록하는데 그쳤다. 연세의대 세브란스병원 심장내과 이찬주 교수는 4일 “콜레스테롤이 높다고 해서 특별한 증상이 있는 게 아니어서 대개는 육류 등 먹는 걸 조심하는 정도만 생각하지, 가족성 고지혈증을 의심하는 경우는 드물다”면서 “특히 젊은 사람들은 콜레스테롤에 이상이 있어도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 등 인식이 낮은 게 문제”라고 지적했다.

가족성 고지혈증은 심혈관질환의 고위험군으로, 심한 경우 이른 나이에 급사(急死)할 수도 있다. 같은 병원 심장내과 이상학 교수가 등록된 FH 환자 296명을 연구한 결과 전체의 19.3%에서 심장 관상동맥질환이 발견됐고 이는 일반 인구의 발생 빈도 보다 3~5배 높았다. 또 건강보험공단 빅데이터 기반으로 평균 6년간 추적한 결과 정상인보다 심혈관사건이 2.4배 많이 발생했고 심근경색, 뇌졸중 위험도 뚜렷하게 상승했다. 하지만 충분한 콜레스테롤 강하 치료를 통해 LDL콜레스테롤을 100㎎/㎗ 미만으로 관리할 경우 심혈관질환 위험은 44% 줄었다.

외국 기준 국내 현실 안 맞아

이런 상황에서 최근 국내 현실과 맞지 않는 건강보험 적용 기준이 적극적인 콜레스테롤 치료의 걸림돌로 지적됐다. 현재 한국인의 FH 치료 목표는 LDL콜레스테롤을 100㎎/㎗, 심혈관질환을 동반한 경우엔 70㎎/㎗ 아래로 관리하는 것이다.

모든 고지혈증의 1차 치료 약물(스타틴, 에제티미브)을 최대 용량 사용하고도 ‘LDL콜레스테롤 100㎎/㎗ 미만’을 지키지 못하고 그 이상으로 나오면 새로운 치료약(PCSK9 억제제)을 건강보험 적용 가격(본인부담률 30%)으로 쓸 수 있다. 보험 적용이 안되면 월 25만원 가량을 부담해야 한다.

또 치료 전 LDL콜레스테롤 수치가 190㎎/㎗이상이면서 알려진 유전자 변이(LDLR, APOB, PCSK9)가 확인됐거나 자신 혹은 가족(1·2촌)의 발뒤꿈치 아킬레스건 등에 ‘황색 지방종(노란 콜레스테롤 덩어리)’이 나타나는 등 ‘명확한 FH’로 진단된 경우에만 보험 혜택을 받을 수 있다. 명확한 FH 진단과 보험 적용을 받기 위해선 황색종과 유전자 변이의 유무가 중요하다.

이찬주 교수는 “문제는 한국인의 경우 유전자검사를 통해 ‘명확한 FH’로 진단됐더라도 황색종이 발견되지 않는 경우가 70%를 넘는다. 또 진단을 위해 1·2촌 가족의 병력(심근경색, 황색종 등 여부)을 알아야 하는데 이에 대해 모르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다. 아울러 “실제 연구를 보면 기존에 알려진 유전자 변이가 확인되지 않는 경우가 40%나 된다. 기존에 알려진 변이가 발견되지 않았다 해서 가족성 고지혈증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 아직 알려지지 않은 유전자 변이도 존재한다”고 설명했다.

즉 국내 가족성 고지혈증 진단 및 건보 급여 기준은 기존 외국의 지침을 너무 엄격히 적용하다 보니 ‘치료 사각지대’가 발생하는 등 한국인 실정에 맞지 않는다는 얘기다.

실제 B씨(28·여)는 얼마 전 자신과 어머니의 LDL콜레스테롤 수치(각각 229㎎/㎗, 200㎎/㎗)가 모두 높게 나와 가족성 고지혈증이 강력 의심됐으나 황색종이나 기존에 알려진 3가지 유전자 변이가 나오지 않아 ‘명확한 FH’ 진단을 받지 못했다. 먹는 콜레스테롤 약을 먹어봤지만 콜레스테롤 값이 계속 120㎎/㎗ 이상 유지됐다. 새로 도입된 PCSK9억제제 사용이 강력히 권고됐지만 비급여로 인한 약값 부담 때문에 선뜻 나서지 못하고 있다.

서울대 의대 순환기내과 김학령 교수는 “한정된 재원을 효과적으로 써야 하지만 PCSK9 억제제 같은 신약이 꼭 필요한 상황인데 비현실적인 보험급여 기준 때문에 심혈관질환 발생 가능성이 큰 고위험군에서 실제 혜택을 보지 못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라며 “조기 진단과 적극적인 치료를 통해 심근경색이나 급사 등 위험을 사전에 예방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찬주 교수는 “보다 많은 환자들이 새로운 약제의 혜택을 보려면 건보 적용 기준을 현실화할 필요가 있으며 나아가 한국인에 맞는 가족성 고지혈증 진단 및 치료 가이드라인 마련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민태원 의학전문기자 twmi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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