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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 in 이건희 컬렉션] 굵은 붓질과 단 한번의 먹선 합친 듯… 선묘 회화의 걸작

이중섭에게 소는 평생을 천착한 분신 같은 소재였다. 위 사진부터 이중섭의 ‘황소’(캔버스에 유채, 1950년대, 26.4×38.7㎝)와 ‘흰소’(캔버스에 유채, 1953-54년, 30.7x41.6㎝).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이중섭(1916∼1956)에게 소는 ‘자아의 화신’이었다. 평양 오산고보 시절부터 소를 그렸다. ‘소에 미치다시피’ 해서 틈나는 대로 들에 나가 소를 관찰했고 스케치북에는 황소와 암소의 온몸, 또는 대가리 뒷발 꼬리 부분 따위가 그려져 있었다고 한다. 미술 교사였던 프랑스 유학파 임용련의 영향이 컸는데 그의 문하생들은 일제강점기 한민족의 상징처럼 소 말 등 동물을 즐겨 그렸다.

소는 이중섭이 일본 유학시절은 물론 해방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그린 소재였다. 소의 머리, 서 있는 소, 싸우는 소 등 다양하게 제작했다.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된 이건희 컬렉션에도 머리 부분만 담은 ‘황소’와 몸 전체를 그린 ‘흰소’ 등 소 그림 두 점이 있다.

이들 그림은 화가 인생에서 절정기였던 경남 통영 시절에 제작됐다. 월남해서 가족과 처음 부산에 정착한 그가 짧은 제주 생활을 보낸 뒤 일본인 아내와 어린 두 아들을 일본에 보낸 뒤였다. 통영에 살던 공예가 유강열(1920∼1976)의 초청을 받아 1953년 11월 중순부터 54년 5월까지 6개월을 나전칠기강습소에서 강사로 일하는 한편 서울 전시를 준비하며 창작욕에 불타던 때였다. 사무치는 그림을 담아 현해탄 건너 가족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지금 우리 네 가족의 장래를 위해서 목돈을 마련하기 위한 제작에 여념이 없소.” “이제부터 가난쯤은 두려워하지 말고 용감하게 인생의 한복판을 매진해갑시다.”

이중섭은 외할아버지가 상업회의소 회장을 지낸 평양의 유력집안 출신으로 유복한 청소년기와 청년시절을 보냈다. 30년대 후반 일본 유학시절 권투 수영 등 못하는 운동이 없고 노래도 잘 부르던 훤칠한 미남 이중섭에게 후배 여학생 야마모토 마사코(한국명 이남덕)가 반했다. 국적을 뛰어넘는 사랑은 결실을 봤다. 하지만 6·25전쟁으로 피란민 처지가 되며 가장 화가 이중섭의 상황은 급전직하했다. 기러기 아빠가 느꼈을 사무치는 외로움, 그림을 팔아 가족 재회를 이룰 거라는 희망, “신세계 신표현의 제일”이라는 화가로서 자부심이 붓질에 범벅돼 있다.

바탕에 붉은색을 칠하고 소의 머리 부분을 은 선묘로 표현한 ‘황소’에서는 소의 힘찬 울부짖음이 메아리치는 듯하다. 죽을힘을 다해 앞으로 나가는 모습의 ‘흰소’는 처절하면서도 자조적인 느낌이 든다. 서양의 화가 루오가 구사하는 굵은 붓질과 동양의 문인화가가 휘두르는 단 한 번의 먹선을 하나로 합쳐버린 듯한 선묘 회화의 걸작으로 평가된다.

이중섭은 통영에서 제작한 그림들을 갖고 상경해 55년 미도파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전시는 대성공이었다. 하지만 수금이 안 됐다. 팔다 남은 그림을 갖고 대구에서도 잇달아 개인전을 열었지만 사정은 더 나빴다. 낙담과 절망에 빠진 그는 56년 정신이상과 영양실조로 40세 젊은 나이에 적십자병원에서 죽었다.

‘붉은 황소의 머리’를 그린 이중섭의 작품은 지금까지 총 4점이 알려져 있다. 이번에 기증된 ‘황소’는 초기의 소장 이력은 잘 알려져 있지 않고, 이건희 컬렉션으로 들어간 후 오랫동안 발표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화가 김종학이 소장했던 ‘흰소’는 72년 현대화랑 이중섭 유작전에 나온 이후 행방이 묘연했는데 50년 만에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손영옥 문화전문기자 yosoh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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