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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 전염병과 한국교회



“1885년에야 첫 목회 선교사가 파송됐습니다. 하나님은 섭리 속에서 1886년 한국에 참혹한 역병이 올 것을 아셨던 것입니다. 하루에 100명이 죽더니 2~3일 후 350명, 이후 서울에서만 매일 1000명이 죽어 나갔습니다.”

연세대와 새문안교회 등을 세운 호러스 G 언더우드 선교사가 1891년 10월 미국 테네시주 내슈빌의 미국 신학교선교연맹에서 강연한 내용이다. 언더우드는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로서 1885년 4월 처음 내한해 복음을 전하다 첫 번째 안식년으로 미국에 잠시 돌아가 각지를 다니며 한국 선교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언더우드보다 1년 먼저 내한한 의사이자 외교관이었던 호러스 N 알렌 선교사는 1886년 7월 12일 “콜레라의 유행, 극심(Epidemic of Cholera, Very severe)”이라는 메모를 남겼다. 그해 7~9월 서울에서만 7000명 넘는 사망자가 나왔다는 기록도 있다.(연세대언더우드기념사업회, ‘언더우드의 마지막 메시지’)

한국교회의 시작은 전염병이었다. 19세기 말 조선은 배설물과 비위생적 물질에서 나오는 병균으로 역병이 반복되는 상황이었다. 백성의 죽음을 넋 놓고 바라보던 조선의 지배층은 자신들이 해결할 수 없는 영역이 있음을 인정하고 조금씩 문호를 열기 시작했다. 살고 싶으면 서양 선교사들의 기독병원을 찾아가라는 말이 번졌다. 예수를 서양 귀신이라고 조롱하던 사람들도 아픈 이들을 몸 바쳐 돕는 선교사들의 헌신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당시 안락한 서구의 환경을 버리고 조선에 선교사로 나오는 일은 그야말로 목숨을 건 선택이었다. 환자를 돌보다 내한 5년 만에 이질로 사망한 존 W 헤론, 헤론의 뒤를 이어 제중원을 맡았으나 자녀 넷과 아내를 모두 잃은 찰스 C 빈턴 등 다수의 선교사와 가족들의 희생 위에 오늘날 한국교회의 기틀이 다져졌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을 계기로 전염병과 한국교회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사태 초기 중국 우한의 코로나19 집단 발병을 두고 중국의 교회 탄압에 대한 심판이란 주장이 나왔지만, 곧 수그러들었다. 일부 언론이 공동체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우한 폐렴’이란 명칭을 고수하다 슬그머니 꼬리를 내린 것처럼 말이다. 엄청난 재앙이 닥치면 남을 정죄하는 데 이용하던 고질병은 확연히 줄어들었다. 일부의 주술적 징벌적 신앙관이 확실히 달라지고 있다.

이젠 한발 더 나아가야 한다. 초기 선교사들처럼 한국교회가 코로나19 대처로 사회적 신뢰를 회복하는 계기를 마련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대구·경북 코로나19 집단발병 사태를 맞아 긴급히 병원 전체를 비우고 이단·사이비든 아니든 정성을 다해 진료한 대구동산병원 역시 1898년 미국 북장로교 우드브리지 존슨 선교사가 세운 시약소(施藥所)에서 출발했다. 전국의 의료진이 자발적으로 모여들어 생명을 돌보는 가운데 참혹한 전염병의 확산을 온몸으로 막은 기적을 이제 교회가 보여주면 좋겠다. 정부가 예배당 예배에 관해 교계에 사회적 거리 두기를 요청하는 것과는 별도로 교회가 각자 속한 마을 공동체의 의견을 존중하는 것이 필요하다. 선교는 사회적 신뢰에서 나오는 것 아닌가.

언더우드 선교사는 1904년 한국선교 20년을 맞이해 “미래엔 모든 대도시에 세워진 중고교들, 의과대학과 간호학교, 모든 도시의 자급하는 병원들, 효율적 한국인 전도부인과 성경 교사들, 고통당하는 자를 돌보고 죽어가는 자에게 빛과 위안을 주는 집사들, 전국 방방곡곡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제로 보여주는 자비의 기관을 본다”고 예언했다. 116년 전 그의 ‘약속된 미래의 환상’에 한국교회가 한 걸음 더 다가갔으면 좋겠다.

우성규 종교부 차장 mainport@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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