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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포커스] 선거제 함정에 빠진 한·일



비례후보 정당이 35개, 투표용지 길이가 무려 48.1㎝에 달한다는 사실은 이제 놀랍지도 않다. 게다가 소선거구 253명에 비례 47명, 연동률 50%라는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는 단 일회용이다. 이번에 한정해서 최대 30석만 연동제를 적용하기 때문이다. 말 많고 탈 많은 이번 선거제는 다시 도마 위에 올려질 것이다. 총선 후 재개정을 둘러싸고 여야가 논란을 벌일 것은 뻔하다. 주요 민주주의 국가에서 비례대표제를 채택한 국가 48개국, 소선거구제인 다수대표제 15개국, 혼합제는 12개국이다. 한국과 일본은 소선거구와 비례대표 혼합제를 적용한 대표적 사례다.

코로나19 대책은 물론 영어 교육, 다문화 정책에 이르기까지 한국이 일본을 앞선 사례가 적지 않지만 선거제도 그중 하나다. 일본이 1996년 총선거부터 적용한 소선거구와 비례대표를 따로 뽑는 병립제는 한국보다 한참 늦었다. 한국은 1992년 당시 지역구 237석, 전국구 62석인 소선거구 비례대표 병립제를 채택하고 있었다. 일본 국회가 기존 중선거구제를 바꾸게 된 계기는 정치부패 사건이었다. 1989년 가을, 일본 정국은 리쿠르트 스캔들로 전후 최대의 정치 의혹에 휩싸였다. 리쿠르트사 미공개 주가 조작으로 부당 이익을 얻은 정치가에는 전현직 총리는 물론 여야 대표 정치가, 고위 공무원까지 수십명이 포함돼 있었다.

일본 국민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고, 많은 논란 끝에 주범은 중선거구제로 지목됐다. 같은 선거구에서 자민당 후보가 2∼4명까지 출마하는 중선거구제는 정강정책보다 후원회에 의존할 수밖에 없고, 정치부패로 직결된다는 것이다. 즉시 민간위원으로 구성된 선거제도심의회가 만들어졌고, 영국 독일 호주 한국 프랑스 등 세계 각국의 선거제를 검토했다.

결국 중의원 선거제도로 소선거구 300명, 11개 블록별 200명 비례대표를 뽑는 소선거구 비례대표 병립제가 채택됐다. 한국과 달리 특이한 점은 중복 입후보를 허용한 것이다. 소선거구와 비례구에 중복 입후보를 허용한 것은 소선거구에서 낙선한 야당 거물 정치가의 당선 보장용이라는 지적이 나왔다. 1996년 10월 총선거에서 소선거구 낙선 후보가 다음 날 아침 비례구에 부활 당선했다. 하룻밤 사이에 울다가 웃는, 그야말로 황당한(?) 사건이 벌어졌다. 좀비 정치가라는 비아냥마저 나왔다.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중복 입후보제는 아직도 바뀌지 않고 있다. 독일도 중복 입후보를 허용한다지만, 소선거구 비례대표 연동형으로 사실상 비례대표제에 가깝다.

남의 일이 아니다. 이번 총선에서 각 정당이 비례대표 당선자를 늘리기 위해 비례 전용 위성정당을 따로 만드는 해괴한 사태가 벌어졌다. 야당의 행태를 비난하던 여당도 정치 현실을 외면하지 못하고 결국 비례정당을 만들었다. 그 결과, 선거명부에 쓰인 비례용 정당은 무려 35개에 달한다. 거대 정당이 비례대표를 독식하지 못하도록 준(準)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도입했음에도 불구하고 의석수에 집착한 꼼수 경쟁으로 전락해 버렸다.

일본은 선거제도를 개정하고자 수차례 국회 내 위원회를 설치했지만 결국 바꾸지 못했다. 공직선거법에서 소선거구 289명, 비례대표 176명으로 바꾼 것 말고, 1표의 격차를 줄이기 위한 의원수 정수 조정에 그쳤다. 총선 후 21대 국회에서 선거법 개정 논란이 일 것은 뻔하다. 정치적 꼼수에 매달리다가는 또다시 일회용 선거제로 끝나게 된다. 한국이나 일본이나 복잡하고 난해한 선거제도에 애꿎은 유권자만 피해를 보고 있다. 동아시아 선진국으로 ‘시장경제와 민주주의를 공유하는’ 한국과 일본은 언제쯤 상식적이고 민주적인 선거제도를 정착시킬 수 있을까.

양기호 성공회대 일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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