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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완·박인하의 만화는 시대다] 80년대 민주화 열망·좌절의 소묘… 충격으로 다가오다

만화가 김혜린은 시대와 조응하는 작가였다. 1980년대 초에는 민주화에 대한 시대적 열망을 담은 만화로, 이후에는 주체적인 여성들의 연대를 그린 작품으로 독자들의 환호를 받았다. 작가 제공


‘북해의 별’은 18세기 유럽 대륙에서 펼쳐지는 가상 국가 보드니아의 공화 혁명을 그렸다. 작가 제공


‘비천무’. 작가 제공


‘불의 검’. 작가 제공




1980년 짧았던 민주화의 봄이 지나가고 신군부가 권력을 장악했다. 민주주의에 대한 꿈은 허망하게 무너지고, 사람들은 말을 잃었다. 많은 이들의 마음을 대변해 준 건 만화였다. 젊은 신진작가들이 펴내는 장편 서사는 칸 안에 다양한 방식으로 시대를 담았다. 어린이들의 전유물처럼 평가받던 만화를 보기 위해 중고생은 물론 대학생과 직장인들이 만화방을 찾았다. 만화방은 중·고등학교와 대학가, 시내 중심가로 퍼져나갔다. 많은 여학생이 만화방을 찾아 새롭게 출간된 여성만화(당시의 ‘순정만화’)를 보았다.

1980년대 여성만화에는 시대의 격변을 통과하는 드라마틱한 사랑, 혁명에 나선 영웅들, 나와 내 친구의 이야기를 담은 듯한 생생한 10대, 그리고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자기 운명의 주인으로 나선 여성이 있었다. 이전 시대와 완전히 달라진 당시 여성만화는 온전히 1980년대 초반에 데뷔한 20대 여성작가의 성과였다. 독자들과 함께 시대를 통과한 여성작가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시대를 반영했는데, 김혜린(사진)의 만화는 1980년대 폭발적으로 확산된 민주화 운동의 열망과 좌절을 담았다. 차마 두려워 말로도 꺼내지 못했던 ‘혁명’을 언급하는 걸 넘어 그 과정을 자세하게 묘사했다. 혁명가 반혁명, 동지와 배신의 과정은 많은 동시대 독자들에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혁명의 대서사시, ‘북해의 별’

김혜린은 1983년 ‘북해의 별’을 발표하며 데뷔했다. ‘북해의 별’은 18세기 유럽 대륙을 배경으로 가상의 국가 보드니아의 공화 혁명을 그린 만화다. 명문 귀족 자제이자 뛰어난 해군 장교인 유리핀 멤피스는 적대 세력의 음모에 휘말려 보드니아에서 추방당해 유배지에 갇힌다. 유리핀 멤피스는 수용소에서 만난 억울한 죄수들과 함께 탈옥에 성공하고 해적단 ‘검은 날개’를 결성해 보드니아를 돕다 결국 혁명에 나선다. 명문 귀족이자 뛰어난 군인, 그리고 누가 봐도 멋진 남자인 유리핀 멤피스는 평민, 귀족의 사생아, 이주민 등과 출신과 계급을 넘어 혁명의 공동체를 만든다.

‘북해의 별’은 총 2400페이지에 달하는 ‘대하서사만화’다. 주로 수십권에 이르는 역사소설이나 초장편 역사드라마 등에 ‘대하’라는 용어를 덧붙이는데, 한국 여성만화에서 ‘북해의 별’이 해당한다. 1970년대 일본에서도 이케다 리요코의 ‘베르사이유의 장미’나 호소카와 치에코의 ‘왕가의 문장’ 같은 대하역사만화가 인기를 끌었고, 한국에도 소개됐다. 이들 만화와 함께 황미나의 ‘이오니아의 푸른별’(1980) 등으로 이어지는 대하역사만화는 역사의 소용돌이를 살아가는 인물의 로맨스를 그려 큰 인기를 끌었다.

김혜린의 ‘북해의 별’은 로맨스보다 역사의 소용돌이 그 자체에 집중했다. 역사의 소용돌이 속 유리핀 멤피스와 함께 하는 동지들의 공화혁명의 여정은 독자들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권력을 장악한 신군부는 언론을 통폐합하고, 민주화 운동을 억압 했지만 희망을 꿈꿨던 대중은 혁명의 이상을 꿈꿨다. 김혜린은 그런 대중들의 꿈을 만화에 정교하게 담았다.

“동지들! 우린 스스로 일어나 뭉쳐서 승리를 얻은 긍지 높은 보드니아인이다! 눈을 크게 뜨고 자신의 자리를 지키자! 앞으로의 시간을 위해서. 동지들! 흐트러지지 말고 지금 전열을 다시 정비하자!”

국왕을 몰아낸 시민군 앞에 선 유리핀 멤피스의 연설은 대중들이 현실에서 보고 싶은 모습이었다. 김혜린은 ‘북해의 별’에서 1980년대 민주화 운동이 꿈꾸던 순수한 공동체적 이상을 순정하게 구현했다. 공교롭게 1987년 ‘북해의 별’이 완간되던 해에 한국은 6월 항쟁으로 새로운 시대를 맞이한다.

혁명에서 여성의 연대로

‘북해의 별’을 완간한 뒤 1988년 무협만화인 ‘비천무’를 만화방용 만화로 발표하고, 동시에 프랑스 혁명을 그린 ‘테르미도르’를 잡지 ‘르네상스’에 연재한다. ‘테르미도르’는 1789년 7월 14일 파리 바스티유 감옥 함락에서 시작된 프랑스 혁명을 그렸다. 평민이었다가 혁명군의 주역이 된 유제니, 혁명 군중에서 부모를 살해 당해 복수를 꿈꾸는 귀족 알뤼느, 혁명의 대의에는 공감하지만 왕당파에도 과격파에도 속하지 않고 방황하는 귀족 줄르. 세 명을 중심으로 여러 실존 인물을 등장시켜 구체적으로 혁명의 경과를 그린다.

단행본 3권 분량의 잡지 연재작 ‘테르미도르’와 달리 만화방에서 1991년까지 발표한 ‘비천무’는 1300페이지 분량의 대하서사만화다. ‘비천무’에서는 원명 교체기를 시대 배경으로 남성 작가-독자의 전유물로 취급받던 무협장르를 재해석했다. ‘북해의 별’과 ‘테르미도르’에서 혁명을 이야기하고 ‘비천무’에서 남성 장르로 소비되던 무협을 재해석한 김혜린은 1992년 SF ‘아라크노아’에 도전한다. 태평양 핵전쟁이 터진 후 철저한 통제로 겉보기에 안정을 누리지만 실은 파시즘의 광기가 가득찬 세계를 그린 만화였다.

여성 주인공의 역할도 조금씩 확대됐다. ‘북해의 별’에서 에델라이드는 남성 주인공 유리핀의 연인이었다. 반면에 남성들로 구성된 유리핀 멤피스의 친구들은 종횡무진 활약하며 혁명의 중심역할을 담당했다. ‘비천무’에서 진하와 사랑을 나누는 여성 주인공 설리는 에델라이드처럼 남성 주인공 뒤에 서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의 욕망을 거침없이 드러냈다. 그는 사랑하는 이와 함께 하기 위해 전장속으로 뛰어들기도 한다. ‘아라크노아’의 지나 박은 핵심 주인공이며, 팀을 주도한다.

본격적으로 여성이 중심에 선 작품은 1992년부터 연재되기 시작한 ‘불의 검’이었다. ‘불의 검’은 청동기와 철기가 교체되는 고대를 배경으로 한다. 철검을 사용하는 카르마키는 청동검을 사용하는 아무르족의 침략해 땅을 빼앗는다. 철검을 비밀을 훔쳐내기 위해 카르마키에 숨어들어갔다 들켜 탈출한 아사는 기억을 잃는다. 카르마키에 숨어 검을 만들던 아무르인 아라와 아버지는 아사를 구해주고 산마로라는 이름을 지어준다. 산마로(아사)와 아라는 사랑에 빠지고 결혼한다. 하지만 아라는 카르마키의 야장(대장장이) 수하이바토르에게 잡혀가 강간당해 아이를 갖게 된다. 주인공 아라는 좌절하지 않는다. 아라는 아무르를 위해 철검을 만드는 법을 배우고 탈출해 아무르의 여야장이 된다.

‘불의 검’에는 작품 속 모든 여성 인물들이 ‘자기 식’으로 서사를 이끌어 간다. 아라에게 원수의 아들을 낳았다고 구박하다가 결국에는 서로를 다독이는 존재가 되는 청산녀를 비롯해 카르마키에 잡혀간 아무르 여성들은 자매애로 서로를 지탱한다. 무녀 소서노는 “남정네들보다 더욱 많은 여인네들이 하늘님을 의지하고 눈물을 닦습니다. 그것은 결코 여인네가 힘없고 마음이 약하여서가 아니라 말 못한 설움, 인내의 시간이 그만큼 더 많기 때문이지요. 우리들은 모두 자매입니다”고 선언한다.

‘불의 검’은 소서노와 카라, 아무르와 카르마키의 운명을 건 대결로 달려간다. 목숨을 건 치열한 싸움 끝에 카라가 쓰러진다. 둘은 마지막 대화를 나눈다.

“나는 다시, 또 다시 태어날 테다.” 카라의 다짐에 소서노가 화답한다. “그땐 내가 네 벗이 되어주마.” 그러자 카라는 “너 같은 친구는 사양이다. 착한 여자 따윈 필요 없어”라고 말한다. 이영희는 ‘안녕, 나의 순-정’에서 “이 여자들의 호쾌한 이별이 나는 참 좋았다”고 회고한다. 혁명의 이상에서 시작한 김혜린 만화는 이렇게 자매애의 연대로 나아갔다.

‘불의 검’을 연재 없이 완결해 나가던 시기 1998년 잡지 ‘이슈’에 광야를 연재했고, 2009년부터 잡지 ‘팝툰’에 ‘인월’을 연재했다. ‘광야’는 일제 강점기를 배경으로 독립운동에 나서는 청년들의 이야기였다. 큰 관심을 모았지만, 안타깝게 연이은 잡지 폐간으로 연재를 이어가지 못했다. 다행히 고려 말과 조선 초를 배경으로 역사의 소용돌이에 맞선 이들을 그린 ‘인월’은 2010년 ‘팝툰’ 폐간 이후 연재가 종료됐다가 2017년부터 ‘이슈’에 재연재되고 있다.

혁명의 이상, 신분과 인종, 계급을 넘어선 공동체의 연대는 물론 그림자처럼 역사의 주체로 전면에 나서고, 우리 모두가 자매라고 선언하는 여성들의 모습까지. 섬세한 펜과 때론 거친 붓에 담겼던 김혜린 만화는 늘 한 발 앞서 시대의 꿈을 담았다. 여전히 많은 독자가 ‘인월’이 보여주는 진지함을 사랑하고 있고, 미완인 ‘아라크노아’와 ‘광야’의 연재 재개를 바라고 있다.

(박인하 청강문화산업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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