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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무대선 괜찮은데… 찬양집회는 언제나 떨려요”



아들 이욱과 함께 미국 헌팅턴교회 찬양집회 무대에 오른 이용(왼쪽).


이용이 가수생활 40년차를 맞았다. 그러다보니 노래 부르는 일에는 이골이 났다. 별로 떨지도 않고 무대에 올라 언제나 제 몫을 해낸다. 그래서 많은 방송국 PD들은 “이용씨를 무대에 올리면 안심이 된다”는 말을 스스럼없이 한다. 다만 개인적으로 지나친 여유 때문에 데뷔 초기의 순수함이 사라진 것 같아서 좀 아쉬울 뿐이다.

연예인교회 출신 장욱조 목사가 멘토 역할

이용은 이런 자신의 이런 모습과 전혀 다른 모습도 있음에 의문과 함께 걱정을 갖고 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찬양집회나 간증집회 같은 교회행사 때면 예외 없이 덜덜 떨리고 위축되기 때문이다.

올해는 코로나19 때문에 이미 2개나 취소됐지만 그는 1년에 10회 정도 교회행사를 다닌다. 적지 않은 횟수임에도 불구하고 도무지 긴장은 줄어들지 않는다. 그래서 한번은 친형 같은 목사를 만나 물어봤다. 그 목사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그건 용이가 아직 믿음이 부족해서 그럴 수도 있고 주님을 진짜 영접하지 못해서 그럴 수도 있어. 그러나 내 생각에는 주님이 용이를 참 많이 사랑하시는 것 같아. 머지않아 일반무대처럼 호탕하게 노래하고 간증하는 날이 올 거야.” 그분은 바로 장욱조 목사다. 한때 같이 연예인교회(예능교회의 전신)에 출석하다가 신학을 공부해 목사 안수를 받은 장 목사다. 이용은 지금도 자신의 신앙상담이 필요하거나 교회집회를 다녀와서 기분이 이상하면 장 목사를 찾는다.

이용은 모태신앙이다. 어렸을 때는 부모님 성화 때문에 마지못해서라도 교회에는 충실히 나갔다. 하지만 가수가 되고 난 다음부터는 그나마 그런 신앙생활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바쁘다는 핑계로 교회 출석을 게을리 하다가 나중에는 주일예배도 거르는 일이 다반사였다.

이에 대해 이용은 솔직하게 말한다. “매니저의 유혹에 흔들렸다. 주일 다 지키다가는 순풍에 돛 달고 가야 하는 큰 배가 항해를 못 하게 된다는 것이다. 주중에는 돈 안 되는 방송이나 인터뷰를 하고 진짜 수입은 주말에 하는 행사나 공연에서 챙겨야 한다는 말이었다.”

거기다 또 있었다. 자주 교회를 다니면 팬들 가운데 타 종교 신자들이 멀어진다는 소위 ‘계산기 이론’까기 작용해 그의 믿음은 식어갔다.

그러다보니 데뷔 초에는 일반 콘서트인데도 찬송가를 꼭 한두 곡씩 부르다가 언젠가부터 아예 찬양곡을 레퍼토리에서 빼 버렸다. 이에 대해 그는 “당시 나는 점점 교만해지고 건방져지면서 마치 내가 하나님인 것처럼 세상 무서운 게 없는 행동을 하기도 했다”고 고백한다.

인기관리 위해 찬양과 멀어지다 회심

여기서 이용의 휘문고 2학년 때인 1973년으로 돌아가 보자. 베트남에서 사업으로 돈을 잘 벌던 아버지가 갑자기 부도를 맞아 빈털터리 신세가 돼 돌아왔다. 열대지방의 풍토병까지 걸린 상태로 귀국했다. 살고 있던 집까지 내주고 그의 일곱 식구는 작은 방 2개짜리 달동네의 초라한 집으로 이사했다. 그때부터 가난의 연속이었고 의지할 곳은 정말 주님밖에 없었다. 그래서 교회에 더 열심히 다녔다. 그렇기도 했지만 영락교회에서 나눠주는 사랑의 쌀을 얻어오지 못하면 부모님뿐만 아니라 5남매도 밥을 굶어야만 했다. 그러면서 이용 아버지의 병세는 점점 더 악화되면서 거의 회복불능의 상태로 치달았다. 그때 그에게 청천벽력 같은 일이 벌어졌다. 아버지가 한남대교에서 투신을 하려다 지나가던 헌병차 눈에 띄어서 자살미수에 그친 사건이 발생했다.

그 이후 아버지의 병환이 점점 악화됐지만 돈이 없어서 치료를 포기하고 집에서 욕창과 싸우고 있었다. 그때 같이 영락교회에 다니던 친한 교인이 용한 침술을 가진 한 노인을 소개해줬다. 그 노인은 매일 집으로 와서 아버지에게 정성스럽게 침을 놔줬는데 희한하게 효과가 좋았다. 기적 같이 치유되고 회복돼서 결국 그의 아버지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다시 생활전선으로 나섰다.

이용은 지금도 그때 그 노인의 말을 토씨 하나 안 틀린 채로 생생히 기억한다. 그 노인은 감사한 마음에 몸둘 바를 몰라하는 자신에게 “하나님이 고쳐주신 거야. 그러니 나한테 하지 말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 후 이용은 물론 가족들의 신앙생활이 크게 바뀌었다. 모든 게 하나님 중심으로 되면서 십일조는 물론 각종 헌금을 열심히 드리고 오르간을 비롯해 교회에서 필요한 것을 채우기 위해 노력했다.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라는 성경 구절이 무슨 뜻인지 알게 된 그야말로 산교육이 됐다.

가족 신앙 큰 변화… 교회 필요한 것 채워

그렇게 그의 가족은 하나님 중심으로 바뀌면서 엄청난 은혜를 받게 된다. 이용 자신도 ‘국풍81 젊은이가요제’에 나가 당당 금상을 받으면서 본격 가수의 길을 걷게 됐다. 가족 모두 부러울 게 없는 인생을 구가하기 시작했다.

이용은 지금도 당시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크나큰 은혜를 생각하면 절로 몸이 움츠러든다고 한다. 특히 지금의 자신보다 젊은 나이에 하늘나라로 가신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함께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에 묵상에 젖을 때가 있다. 거기에다 언젠가 장욱조 목사가 말한 “주님이 이용을 사랑하시는 것 같아”라는 말까지 오버랩되면 능력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한다.

고비마다 놀라운 은혜
인기절정 시절 불의의 스캔들로 미국행
부친 “가요계 컴백 명예회복하라” 유언

우리나라 중장년층을 대상으로 가창력 뛰어난 대중가수를 꼽으라고 하면 어김없이 이름을 올리는 이가 이용이다. 아직도 수많은 이들은 매년 10월 말이면 그의 히트곡 ‘잊혀진 계절’을 떠올리고 흥얼거린다. 그는 1980년대 최고의 히트메이커 조용필의 7년 연속 최고 인기상을 저지한 가수라는 기록을 남겼다.

‘바람이려오’ ‘사랑과 행복 그리고 이별’ ‘잠들지 않는 시간’ 등 숱한 히트곡을 남긴 이용은 지금까지 12집의 앨범을 냈으며 자신이 직접 작곡한 노래도 80여곡은 된다. 김지애의 ‘몰래한 사랑’, 하춘화의 ‘사랑은 길어요’ 등이 그의 작품이다.

이용은 금수저 출신이다. 아버지는 평북 정주 출신으로 6·25 전쟁 때 월남한 뒤 육군사관학교를 나와 고급 장교로 근무했다. 어머니는 명문 수원여고를 졸업했다. 그는 외갓집인 수원에서 태어나 인천에서 자랐다. 수원의 외갓집은 당시 제재소를 운영했는데 지역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부유한 집안이었다.

노래를 잘 하는 그의 어머니는 평소 “아들 둘을 낳으면 첫째는 명문대에 보내 판검사를 시키고, 둘째는 가수를 시키고 싶다”고 했다. 반면 아버지는 엄격한 성품이어서 연예인이 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이용은 인천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다. 아버지가 군 전역 후 인천에서 의료사업을 했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아버지는 신장염으로 오래 고생을 했지만 잘 극복할 수 있었다. 아버지는 이어 시멘트블록 사업에 손을 대면서 사업을 번창시켜 나갔다.

하지만 좋은 시절은 오래 가지 않았다. 사업이 하루아침에 망하면서 가족들이 서울 한남동 빈촌으로 이사를 했다. 이용이 휘문고 2학년 재학 때였다. 학비를 대지 못할 만큼 집안형편이 갑자기 어려워졌다.

그때 이용의 집안을 도운 곳은 교회였다. 평소 가족들이 신앙생활을 열심히 해온 터라 교회에서 기꺼이 도움을 손길을 보내줬다. 끼니조차 때울 수 없을 정도로 가난한 상태에서, 어디 한곳 기댈 데 없는 그의 집안을 역시 하나님은 외면하지 않으셨다. 우여곡절 끝에 당시 정치모 담임교사의 도움으로 등록금을 내고 겨우 졸업할 수 있었다.

일찌감치 대학진학은 포기했다. 그리고는 우선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에 여러 호텔을 전전하며 청소부까지 겸하는 가수 아닌 가수 생활을 했다. 그때도 그의 노래를 듣는 사람들마다 뛰어난 가창력만큼은 인정했다.

그렇게 2년여를 보낸 뒤 1977년 강원도 철원의 백골사단에 입대를 했다. 입대 후 운이 좋게도 ‘백골쇼’ 단원으로 발탁돼 노래를 하게 됐다. 특히 입대 동기인 한규철과 함께 부른 노래 ‘사랑하는 그대여 날 좀 봐요 날 좀 봐요…’라는 ‘밀양 머슴아리랑’은 단연 인기였다.

당시 사단장이었던 박세직 장군은 물론 다른 여러 장교들로부터 많은 칭찬을 받았다. 이런 인연으로 그는 사단통신대대에서 대대장 당번병으로 근무했고 백골쇼가 있을 때마다 수시로 군악대로 파견 나가 단원 생활을 했다. 그런 점에서 이용은 ‘백골쇼’로 청중들을 상대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그때 그는 노래가 자신의 인생임을 깨달았다.

33개월 만에 만기 제대한 그는 그해 대학입학 예비고사에 도전해 240점을 받았다.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1차 대학은 도전하기 어려운 점수였다. 할 수 없이 2차인 서울예전 입학시험에 응시해 전체 수석을 차지했다.

그의 노래 실력은 대학 1학년 때 열린 ‘국풍81’ 가요제에서 금상을 받으면서 확고히 입증됐다. 이 가요제 수상은 그의 가요계 공식 데뷔였다. 그는 학교의 명예를 빛낸 공로로 서울예전 재학 내내 장학금을 받고 다닐 수 있었다.

졸업하자마자 가수 이용의 인기몰이는 대단했다. ‘바람이려오’와 ‘잊혀진 계절’을 연이어 히트시키면서 단번에 최고의 인기가수 반열에 올랐다. 여기저기에서 ‘가수왕’이라고 불리는 게 조금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다가 그는 절정의 인기를 뒤로 하고 1985년 홀연히 미국으로 떠났다. 예기치 않은 소문에 휩싸여 모든 것을 내려놓고 공부나 할 생각으로 템플대 음대에 진학했다. 재학 중 부모 같은 테일러 교수를 만나면서 마음의 평정을 되찾아 음악공부에 전념했다. 이 때 ‘몰래한 사랑’을 작곡했고 노래가 아주 좋다는 평가와 함께 A플러스 장학금을 받았다.

이 무렵 오랫동안 지병을 앓다가 기적적으로 회복해 미국계 건설회사에서 근무하던 아버지의 건강이 다시 좋지 않게 돼 어쩔 수 없이 귀국하게 됐다. 1988년 4월쯤이었다. 이용은 그때 아버지로부터 일생일대의 중요한 유언을 듣게 된다. “네가 가수생활을 하다가 스캔들이 난 거니까 다시 가요계에 컴백해서 명예를 회복해라” 아들이 가수 되는 것을 싫어했던 분이 세상을 떠나기 직전 ‘가수 컴백’이라는 말씀을 해주신 것이다.

귀국은 했으나 방송은 여의치 않았다. 생활비는 없고 하니까 출연료에 상관없이 하루에 밤무대를 아홉 군데나 뛰었다. 그럭저럭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형편이 나아졌다. 인천에 작은 아파트도 하나 분양받아 밤무대 수입으로 갚아나갔다.

그러던 중 아파트 입주를 앞두고 한 지인으로부터 경매에 나온 과천의 단독주택을 추천받았다. 평소 공기 좋은 곳에 살고 싶다는 생각을 갖고 있던 터라 얼른 분양받은 아파트를 처분하고 은행 융자를 보태서 40대에 들어 처음으로 집 한 채를 장만했다. 그 무렵 막혀 있던 방송출연도 마침내 풀렸다. 그러면서 지독하게 꼬여 있던 노래 인생도 서서히 풀렸다. 2003년 신곡 ‘후회’가 방송 1위 곡에 올랐고 2004~2005년 MBC 라디오 두시만세 ‘꽁노래방’에 고정 게스트로 출연하는 것을 시작으로 라디오 출연도 컴백했다. 이어서 KBS 아침마당 고정 패널로 자리 잡는다 싶더니 여기저기 TV방송 프로그램 진행까지 맡게 됐다. 출연요청이 쇄도하고 제2의 가수 인생의 전성기를 맞는다.

이용은 오랜 방송 출연금지 기간에 틈틈이 양로원과 고아원, 재소자를 위한 봉사활동을 벌였다. 그 덕분에 선행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2018년 10월에는 그의 히트곡 ‘사랑과 행복 그리고 이별’의 원 가수 이탈리아의 알바노가 내한, 함께 뮤직비디오를 촬영했다.

올해 우리 나이로 64세를 맞는 이용. 그는 가수로서 마지막 인생을 활활 불태우고 좋은 후배들을 키우고 싶은 욕심도 갖고 있다. 그리고 미국 웨스트버지니아 마샬주립대 음대 교수로 있는 아들과 함께 공연하는 꿈도 갖고 있다.

전병선 기자 junb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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