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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 가르기 넘어 ‘선 밖의 예수님’을 만나라

진보와 보수, 남성과 여성,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을 나누는 편 가르기는 예수님이 원하는 소통 방식이 아니다. 선 밖의 예수를 보려면 진영 논리를 벗어나야 한다. 게티이미지




“당신의 정치 성향은 보수와 진보 중 어디에 더 가깝나” “태아와 산모의 권리 중 무엇을 더 우선해야 하는가” “남성과 여성이 모든 분야에서 평등해야 한다고 보나, 아니면 성별 역할이 있다고 보는가.”

위와 같은 질문을 받으면 어떤 생각이 드는가. 이 책은 이들 질문에 “진저리가 날 만큼 싫고 지겹다”고 대답하며 시작한다. 저자는 팀 켈러 목사와 함께 뉴욕 리디머장로교회에서 5년간 대표 겸 설교 목사로 활동했던 미국 내슈빌 그리스도장로교회 스캇 솔즈 목사다. 그는 기독교와 비기독교 사이에서 벌어지는 각종 편 가르기에 피로감을 호소하며 되묻는다. “낙인을 찍고, 찍히는 일이 지겹지 않은가.… 의견을 사실처럼 말하는 행태에 진절머리나지 않나.… 모두를 공격할 뿐, 아무도 설득하지 못하는 분노에 찬 SNS 글이 지겹지 않은가.”

저자는 이처럼 누군가를 판단하며 의분을 표하는 데 흥분을 느끼고 이에 중독된 것을 ‘분노 포르노’(outrage porn)라 부른다. 팀 크라이더 뉴욕타임스 논설주간의 글에 등장한 표현이다. 미국뿐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흔히 찾아볼 수 있는 현상이다. 문제는 이런 태도가 그리스도인에게 적합하냐는 것이다.

저자는 예수가 이와 정반대의 대화법을 구사했다고 말한다. 자신과 신념이 달라도 욕하지 않고 상대를 존중하며 온유하게 대했다. 정치적 문제에도 어느 한 편에 서지 않았다. 본인 자체가 진리인 예수는 언제나 ‘그분 자신의 편’에 섰다.

제자들의 모습도 이런 스승의 태도를 닮았다. 열두 제자엔 정치적 색채가 매우 다른 세리 마태와 열심당원 시몬이 포함돼 있었다. 세리는 로마제국을 위해 일해 ‘민족 반역자’로 불렸는데 반해, 열심당은 정권 전복 세력이었다. 정치적 성향보다 신앙을 더 우선시했기에 가능한 조합이었다. 열심당원과 세리가 신앙으로 정치적 입장을 초월할 수 있다면, 우리도 진영 논리를 떠나 그렇게 살아야 한다.

저자는 “나와 다른 후보에게 투표했다는 이유로 그의 신앙을 의심하는 행위는 잘못”이라고 분명히 말한다. 그러면서 “하나님 나라는 보수 가치와 진보 가치 모두에서 비롯한 사랑의 행위로 확장되는 것”이라며 “기독교는 두 시각의 장점을 받아들이는 동시에 두 시각에 내재한 흠과 불의를 거부한다”고 정리한다.

성경 속 예수의 행적을 살펴보면 종종 극우보다 더 보수적이기도 했고, 극좌보다 더 급진적이기도 했다.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루리라”(마 5:18)고 말하는 동시에 여성과 어린이, 장애인과 가난한 자 등 사회적 약자를 존중했다. 오늘날은 어떤가.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선을 긋고 피아 식별에 열을 올린다. 기독교인이라면 그 누구의 편이 아닌 예수 편에 서야 한다. 상대의 옳은 부분에 마음을 열고자 하는 의지도 계속 간구해야 한다.

책은 교회 안을 그어진 선을 다루는 동시에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을 가르는 ‘교회 밖의 선’도 다룬다. 저자는 기독교인이 사회에서 ‘늘 뭔가에 반대하는 자’로 비치는 현실을 개탄한다. 저자는 비기독교인을 정죄하는 것이 기독교인의 임무가 아님을 깨닫고, 될 수 있는 대로 그들을 인정하자고 제안한다. “인간은 하나님을 닮았으므로 모두가 위대하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 이것이 기독교인의 의무다.

기독교인이 동성애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에 대한 의견도 담았다. 저자는 기독교인 동성애자 친구에게 그의 동성연애를 지지할 순 없다고 말했던 일화를 먼저 소개한다. 구약과 신약 어디에도 동성애를 긍정적으로 보는 목소리를 찾기 힘들어서다. 오히려 동성애를 언급하는 성경 구절은 시종일관 엄한 경고성 어조를 띈다. 하지만 “성경이 이렇게 말하니 잔말하지 말라”는 식의 고압적 접근은 피한다. 동성애자든 비혼주의자든, 이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깊고 강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인종차별, 가나안(신앙은 있지만 교회에 출석하지 않는) 교인 문제와 천국과 지옥 논쟁 등 교회 안팎의 첨예한 사안을 여럿 다룬다. 문제는 각기 다르지만, 대안은 같다. ‘편 가르기’란 원초적 욕망을 누르고 선 밖의 인간을 만나라는 것이다. 그럴 때, 비로소 그곳에 서 있는 예수를 보게 될 것이다.

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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