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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태원의 메디컬 인사이드] 메르스, 코로나19 그리고 지피지기



“전쟁을 하려면 지피지기(知彼知己)여야 이기는데, 지피도 지기도 못했다.”

2015년 7월 22일 국회 메르스특별위원회에 참석한 문형표 당시 보건복지부 장관이 한 말이다. 중동의 사막에서 발원한 미지의 메르스(MERS·중동호흡기증후군) 바이러스가 그해 5월 20일 국내에 처음 들어와 무방비의 병원을 중심으로 부지불식간에 퍼졌다. 12월 최종 종식이 선언될 때까지 186명의 감염자를 냈고 38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국가 방역체계의 허점과 의료계 민낯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정부는 초동 방역실패의 책임을 인정하고 통렬한 반성문을 썼다. 보건당국의 수장은 손자병법의 ‘부지피부지기, 매전필태(不知彼不知己 每戰必殆·적은 물론 자신을 알지 못하면 매번 전쟁에서 위태롭게 된다)’를 인용하며 고개를 숙였다.

이후 국가 방역강화대책이 발표됐고 차관급 기관으로 격상된 질병관리본부에는 24시간, 365일 감염병 대응 긴급상황실이 생겼다. 전 세계에서 발호하는 감염병 동향을 감시하는 곳이다. 의료계의 감염관리체계도 한층 개선됐다. 이런 지피지기의 노력은 어느 정도 효력을 발휘했다. 그간 수많은 감염병의 위협이 계속됐지만 무리없이 방어해 냈다. 2년 전 메르스가 재차 찾아왔을 때도 추가 환자 발생 없이 막아냈다.

그런데 5년이 흐른 지금, 대한민국은 또다시 해외에서 유입된 낯선 바이러스 공격에 휘둘리고 있다. 이번엔 중국 우한이 진원지인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이다. 더구나 메르스 사태 때는 경험하지 못한 지역사회 유행이라는 새 국면을 맞고 있다. 첫 환자 발생 37일 만에 감염자가 1000명을 넘어섰다. 메르스 전체 환자의 6배가 넘는다. 감염 경로를 알 수 없는 환자가 나타난 지난 20일 기점으로 1주일 새 감염자 수가 폭발적으로 늘고 사망자도 속출해 국민 불안이 커지는 상황이다.

왜 이렇게 됐을까. 냉정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코로나19의 유행 곡선(epidemic curve)을 보면 초기 한 달 정도는 방역에 나름 선방했다. 중국과 동남아 유입 감염자를 걸러내고 그들의 접촉자를 찾아내 관리하는 이른바 ‘봉쇄 전략’이 통했다. 전문가들도 방역당국의 초동 대응에 아주 후한 평가는 아니더라도 메르스 때처럼 박한 점수를 주진 않는다.

지역사회 감염이 걷잡을 수 없이 확산하고 있는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정부가 뒤늦게 감염병 경보 단계를 ‘경계’에서 ‘심각’으로 올리고 중증 환자와 사망자 등 피해를 최소화하는 완화 전략으로 방향을 선회했지만 이미 물은 엎질러졌다. 실기했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려워 보인다. 일각에선 메르스 이후 세워진 방역 틀에 너무 얽매여 대응해 화를 키우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지역사회 유행을 차단하려면 5년 전 메르스 때와는 차원이 다른 ‘지피지기’와 유연한 대응이 필요한데, 그러지 못하다는 것이다.

우선 ‘지피’ 측면에서, 적을 너무 얕잡아 봤다. 초기에 메르스보다 치사율이 낮다는 이유로 코로나19의 높은 전파력을 간과한 것이다. 코로나19는 메르스와 같은 코로나바이러스 계열이지만 더 영리하게 진화된 바이러스다. 증상 발현 전인 잠복기에도 감염력을 가지고 증상의 스펙트럼도 다양해 포착해 내기가 쉽지 않다. 감기 몸살 같은 경증이 80%를 차지하고 이 단계의 숨은 감염자들이 방역망 밖에서 활보하며 지역사회 전파의 핵심 축이 되고 있다. 이런 이유로 한 전문가는 코로나19를 ‘스텔스(stealth) 바이러스’라고 칭했다. 반면 메르스는 발열, 기침, 폐렴 등 전형적인 호흡기 증상으로 쉽게 의심할 수 있고 주로 병원 내 감염으로 이뤄져 병원 폐쇄와 의료진 격리 등 조치로 어렵지 않게 퇴치가 가능했다.

이처럼 메르스보다 영악한 코로나19와 대적하려면 한 차원 높은 ‘지기’와 그에 맞는 무기를 구사해야 한다. 지금 정부가 내놓는 방역책들을 보면 메르스 때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듯해 아쉽다.

의학전문기자 twmi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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