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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필균·임경섭의 같이 읽는 마음] 어떤 ‘이야기’는 삶의 ‘이름’이 될 수도 있다

영어로 당신의 이야기는 무엇인지 묻는 문구가 적힌 사진이다. 사진 속 글귀처럼 누구나 자신만의 이야기는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자신과는 무관한 것처럼 보이는 남의 이야기더라도 그 안에는 ‘나’를 투영할 수 있는 지점이 존재하곤 한다. 이랑의 첫 소설집 ‘오리 이름 정하기’를 읽으면 이 같은 특성을 지닌 이야기의 힘을 실감할 수 있다. 픽사베이






‘나’는 도처에 있다. 라디오에서 DJ가 읽어주는 다른 이의 사연 속에, 자주 듣는 익숙한 멜로디의 노래 가사 속에. 주말마다 코미디 프로그램을 챙겨 보며, 과장되고 엉뚱한 모습에 깔깔대는 것도 그 안에서 내 모습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코미디언이 왜 그런 말과 행동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그들의 모습에 결코 웃을 수 없을 것이다.

혈액형별 성격이나 심리 테스트 결과를 볼 때면 어쩜 그렇게 나를 잘 말해주는지 무릎을 치기도 하는데, 사실 이건 다른 혈액형별 성격이나 A타입의 심리 결과에 B타입의 그것을 가져다 놓아도 같은 마음이 들 거라는 걸 안다. 그것은 거기에 쓰인 결과들이 잘못됐다기보다는 “내 속에 내가 너무도 많아서”다(노래 가사가 나를 또 이렇게 담고 있다). 지하철이나 버스 안에서 부대끼는 사람들을 보며, 내가 듣는 라디오 사연과 노래 가사에서, 내가 보는 코미디 프로그램과 혈액형별 성격과 심리 테스트에서 똑같이 자신을 발견하는 이가 있다고 생각하면 괜스레 맘이 짠해지기도 한다. SNS에서 보는 사진과 글들이 꼭 내 마음 같을 때도 있다. 그럴 땐 ‘좋아요’와 ‘하트’를 누르는 마음도 각별해진다.

하지만 무엇보다 ‘나’를 가장 많이 발견하는 곳은 뭐니 뭐니 해도 소설이다. 이랑 작가의 첫 소설집 ‘오리 이름 정하기’를 보면서 다시금 그 사실을 깨달았다. ‘이야기책’이라 이름 붙인 이 책에는 소설뿐만 아니라 희곡 형식으로 쓰인 작품을 비롯해 다채로운 열두 편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작가의 상상력으로 빚어낸 이 낯선 공간에서 나는 자주, ‘나’와 마주쳤다. 매혹적인 이야기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이야기 속 인물의 삶에서 ‘나’와 마주치는 일은 ‘공감’을 넘어, 내가 잊고 있던 나의 과거, 현재 혹은 미래까지 ‘실감’하게 한다. 그런데 좀비로 뒤덮인 도시처럼, 작가의 상상력이 나의 생활과 너무 동떨어져 있을 때가 있다. 그럴 땐 조금 다른 방식으로 ‘나’를 찾게 된다. 이야기 속의 결정적인 한마디가 불현듯 날아와 뒤통수를 후려치는 것이다. 이를테면 “계속 사람으로 있으려고 하니까 힘든 거 아니야?”(‘하나, 둘, 셋’) 같은 한마디. 그것은 이야기 속의 대화가 아닌 이야기 자체가 내게 건넨 말이 됐고, 도시를 뒤덮은 좀비와 그 속에 갇힌 상황은 일상의 알레고리로 내 앞에 놓였다.

하나의 이야기가 나의 삶의 어떤 부분과 맞닿아 있음을 확인하면서, 어쩌면 이야기를 짓는 일은 다양한 삶의 모습에 이름을 붙여주는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삶이 워낙 거대하니까 소설 한 편이 이름이 되는 것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주먹 쥐고 일어서’처럼 인디언식 이름보다 좀 더 길게 써 내려가는 것. 오래전 생각이다. 그런데 이 책에 실린 ‘오리 이름 정하기’를 읽으며 그 생각이 다시금 떠올랐다. 부조리하거나 예상치 못한 일로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름을 가질 수도 있다는 것을 신들의 천지창조 이야기에 담아낸 이 독특한 설정의 표제작은 내 삶의 이름들을 새삼 고민하게 했다. 이어지는 소설 ‘똥손 좀비’에서 하루아침에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 삶을 살게 된 용훈이 자신의 진짜 모습을 찾아가는 이야기가 허무맹랑하게 보이지 않은 것은 그 때문이었다.

2부와 3부에는 일상적 공포를 벗어날 수 없고 일이나 관계에서 성적 대상으로만 여겨지는 지금의 여성 이야기(‘이따 오세요’ ‘섹스와 코미디’ ‘당신의 능력을 보여주세요’ ‘센세이숀-휏숀’), 엄마와 딸의 비틀린 관계와 벗어날 수 없는 대물림에 대한 이야기(‘한국 사람의 한국 이야기’ ‘증여론’),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의 당위 또는 영감을 얻기 위해 신과의 대화 혹은 응답을 바라는 이들의 이야기(‘나는 오늘 들었다’ ‘깃발’) 등이 실려 있다. 이 또한 모두 나의 이야기이자 내 삶의 이름들이었다.

<김필균·출판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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