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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리사니-정건희] 부끄러워요



오랜만에 친구와 한잔 하기로 했다. 와이프 퇴근이 늦어서 밥 먹이고 영어교실에 데려다줘야 한다며 여섯 살짜리 아들 손을 잡고 나타났다. 갓난쟁이 때부터 본 녀석이 벌써 커서 제법 우당탕탕 달리기도 하고, 아빠랑 농담 따먹기도 하는 모습을 보니 내 아들도 아닌데 퍽 대견스러웠다. “삼촌 기억나?” “아니요.” “저기 옆 테이블에 아기 보이지? 네가 저만 할 때 우리 자주 봤었어.” “진짜요?” “그럼. 그땐 저 아줌마, 아저씨처럼 엄마, 아빠도 ○○이 때문에 밥도 제대로 못 먹고 그랬어.” “에이, 부끄러워요.” “왜?” “저렇게 울고 떼쓰고 할 때 아저씨랑 본 거잖아요.” “○○이는 이제 안 그래?” “그럼요!”

아이들은 참 솔직하다. 딱히 부끄러운 일도 아닌데 부끄러워할 줄 안다. 적어도 똑같은 잘못을 했을 때 ‘내가 한 건 괜찮고, 네가 한 건 안 괜찮다’고 애써 외면하지 않는다. 부끄러움을 딛고 하루하루 커가는 모습에 한때 아이었던 우리는 부럽고, 또 부끄럽다.

개인적으로 참 부끄러운 한 주였다. 국내에서 휴가를 보냈는데 해외로 나가지 않은 걸 후회했다. 어디를 가나 민망한 뉴스가 끊이지 않았다. 정치부에 몸담았던 몇 년간 현 집권당을 출입하며 시청 앞 천막 농성부터 세월호 국정조사, 국정농단 청문회와 탄핵 국면, 대선 승리까지 발치에서 바라봤다. 어느 정도 출입처에 경도됐을까. 새 정부가 부끄러운 어제를 뒤로 한 채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며, 결과는 정의로운’ 시대를 열어주길 진심으로 바랐다.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의 딸 입시 부정 논란은 그래서 더 부끄러웠다. 현 정부가 지상과제로 천명해 온 사법개혁을 완수하겠다며 조 후보자를 내세운 건 그가 이 사회의 기득권과 기성 권력, 각종 특혜를 강력하게 비판해 온 일종의 ‘상징’이어서다. 원리와 원칙, 논리와 이성에 근거하는 법학자에게 걸었던 대중의 기대는 산산조각 났다. 조 후보자의 침묵 와중에도 이번 특혜 논란의 국면, 국면이 과거 조 후보자 자신이 남겼던 수많은 ‘말’로 고스란히 반박당하거나 논파되고 있다. ‘말과 글’로 호구지책을 삼는 일종의 동업자로서 분노 이전에 내 잘못인 양 부끄러웠다.

더 부끄러운 건 국민의 분노를 촉발한 ‘역린’이 뭔지 제대로 보려 하지 않고 핀트가 어긋난 ‘실드(방어막)’를 펼치고 있는 정부여당 관계자들이다. 이번 특혜 논란에는 적법성의 문제가 아니라 적법의 경계선에서 탈법, 편법을 부끄럽지 않게 저질러 온 기득권에 대한 대중의 분노가 투영돼 있다.

그럼에도 “특혜가 아니라 보편적 기회, 열려 있는 제도” “어느 정도 지위를 가진 분들에게 열려 있는 기회” “조 후보자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정권 차원의 문제” “내부 균열이 생기면 망한다”고 감싸는 언사들은 국민 정서와 분명 거리가 멀어 보였다. 곁에서 교류할 때 분명 합리적이고, 정의로운 가치를 추구했던 그 ‘선배’들의 입에서 나온 멘트인가 의심스러운 수준이었다. ‘그때 그들은 잘못했지만, 지금 우리는 잘못한 게 아닌가’ 되묻고 싶어졌다. 왜 부끄러움은 모두의 몫이어야 하는가.

문재인 대통령이 촛불의 힘으로 집권한 것은 반칙과 특권의 대척점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번 법무부 장관 임명을 둘러싼 수많은 잡음은 지지자들로부터 그 진심마저도 갉아먹고 있다. 우리 정치권에서 진보진영이 보수진영에, 현 정권이 야당에 비교우위를 점하는 부분은 비록 상대적이긴 하지만 ‘도덕적 우위’가 아니었던가. 그마저도 포기하면 지지자와 중도층에 무엇으로 어필할 수 있을지 궁금해진다.

이승엽 KBO 홍보대사는 최근 퓨처스리그 후배 선수 대상의 한 강연에서 자신의 과거 영상이 재생되는 동안 고개를 숙였다. ‘(사인을) 너무 많이 해드려서 아무래도 희소성이 떨어지는 것 같다’는 과거 발언을 반면교사로 삼으라며 부끄러워했다. “어떤 이유로도 변명이 되지 않는 큰 실수를 했다. 절대 나처럼 못난 실수를 되풀이하지 말라는 뜻”이라고 해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던 많은 야구팬들 역시 진정성을 느꼈다. 실수를 부끄럽게 여기고 변명이 아닌 사과를 해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걸 국민타자는 몸소 보여줬다. 정치는 전쟁이라지만 모든 전투에서 꼭 이겨야 하는 건 아니지 않나. 부끄럽지만 인정하고, 지금이라도 변명 대신 덜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줬으면 좋겠다.

정건희 산업부 기자 moderato@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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