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김의경] 봉숭아 꽃물



문방구에 갔는데 손톱에 봉숭아 꽃물을 들이는 제품이 보였다. 꽃과 잎을 절구에 넣고 빻는 복잡한 절차 없이 가루에 물을 섞어 30분 만에 간단히 꽃물을 들일 수 있는 제품이었다. 반가운 마음에 그것을 사 와서 손톱에 꽃물을 들여봤는데 그럭저럭 어린 시절의 추억을 되새길 수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빨리 물이 들어버리는 봉숭아 꽃물은 왠지 아쉬웠다. 주황색 손톱을 보고 있자니 돌아가신 할머니가 생각났다. 할머니는 매해 여름, 손자 손녀의 손톱에 봉숭아 꽃물을 들여주셨다. 어린 내게는 그것이 얼마나 고대하던 행사였는지 화단에 봉숭아꽃이 피면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였다.

할머니는 봉숭아꽃과 잎을 따다가 백반과 함께 절구에 넣은 다음 절굿공이로 빻아 반나절 동안 냉장고에 넣어두었다. 그리고 밤에 잠들기 전에 손자 손녀를 불러 모았다. 비닐을 손가락 밑에 대고 손톱 위에 으깬 봉숭아꽃을 올려놓는 순간의 감촉이 어찌나 차갑고 또 시원한지, 나는 몸을 떨며 즙이 스며 나온 봉숭아꽃의 냄새를 코로 들이마셨다. 할머니의 엄지와 검지는 우리들의 손에 으깬 봉숭아꽃을 얹어주느라 벌써 붉게 물들어서 내일 아침에 붉게 변해 있을 손톱에 대한 기대감을 더욱 부풀렸다. 할머니는 비닐을 실로 묶으며 손톱에 들인 봉숭아 꽃물이 첫눈이 올 때까지 남아 있으면 첫사랑이 이루어진다고 했다.

단단히 실로 동여매서인지 잠을 자는 동안 손가락이 간지럽고 아팠다. 그래서 자고 일어나면 손가락에 동여맨 비닐 열 개가 모두 그대로 남아 있는 법이 없었다. 도중에 스스로 비닐을 빼버리는 통에 한두 개는 다른 곳보다 색이 엷게 물들어 있었다. 꽃물을 들이기 전에 손톱 주변에 투명 매니큐어를 칠하면 손톱 밖으로 벌겋게 물들지 않게 할 수 있었지만 손가락까지 붉게 물들어버리는 것이 삐져 나왔을 때 지울 수 있는 매니큐어와는 다른 봉숭아 꽃물만의 매력이었다. 나는 손톱이 길어서 친구들보다 늦게 들여도 가장 늦게까지 꽃물이 남아 있었다. 사춘기 시절에는 조금씩 사라져가는 봉숭아 꽃물을 보며 첫눈을 기다렸다면 이제는 할머니와의 추억을 떠올린다. 봉숭아 꽃물은 나에게 있어 기다림과 그리움이다.

김의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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