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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윰노트-홍인혜] 물의 품에서



운동을 싫어한다. 육체는 고즈넉이 두는 것이 미덕이라 생각한다. 수평적 삶을 추구해서 주로 누워 있곤 한다. 그 탓인지 차곡차곡 나이를 먹으며 건강검진 결과지가 날로 빼곡해지고, 탐정도 아닌데 추적해야 할 이상 징후들이 늘어나고 있다. 그러다가 깨닫고 말았다. 더 이상 운동은 호불호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라는 사실을 말이다.

사무치는 위기감에 여름이 시작될 무렵 수영 강습을 등록했다. 날씨에도 어울리고 물놀이라면 그나마 즐겁게 할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나의 수영 실력은 20여 년 전에 배운 자유영에 멈춰 있었다. 물에 빠져 죽을 정도는 아니지만 우아한 평영이나 역동적인 접영은 아득한 꿈의 영법이었다. 그래, 이 기회에 새로운 영법을 익혀 보자. 그렇게 나의 평영 도전이 시작되었다.

수업의 첫날, 위아래로 물을 차는 자유영의 발차기가 아닌 개구리처럼 다리를 뻗었다 모으는 새로운 동작을 배웠다. 처음엔 선생님이 발을 쭉 밀어줘서 앞으로 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홀로 둥실 떠서 배운 대로 다리를 움직이는데 우아하게 몸이 앞으로 나아가기는커녕, 1㎝도 전진하지 않았다. 나는 물에 접착된 사람 같았다. 제자리에서 허우적대는 나에게 다음 차례의 사람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가 마치 죠스처럼 느껴졌다. 나는 익숙한 자유영 발차기로 허겁지겁 달아났다. 나는 당황했다. 대체 왜 전진할 수 없는 것인가. 선생님은 내가 눈에 띌 때마다 ‘발바닥!’하고 고함을 쳤다. 물을 발바닥으로 힘껏 밀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물은 한없이 무르기만 했다. 아무리 물을 딛으려 해도 그것은 그저 나의 발 날에 부질없이 갈라지고 발가락 사이로 덧없이 허물어졌다. 나를 물 복판에 고정한 채. 그 후로 몇 주를 발차기만 했고 낯선 근육통에 시달렸지만 나의 속도는 개선되지 않았다. 그 와중 팔 동작이 추가됐다. 물을 양팔로 가르고 퍼 모으듯 앞으로 가져오는 동작이었다. 이 팔 동작과 발차기가 리드미컬하게 결합해야 하는데 당연하게도 쉽지 않았다. 그때 나에게 찾아온 것은 내가 이 반의 꼴찌라는 통렬한 깨달음이었다. 줄을 이어 수영하는데 교통체증을 일으키는 주범이었다. 다들 접영도 멋지게 하는데 나는 몇 주간 평영의 흉내조차 내지 못하다니 한심스러웠다. 그냥 그만두고 싶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수업을 마칠 무렵, 선생님이 제자들을 둥글게 모으더니 말씀하셨다. “여러분 수영 최대의 적이 뭔지 아세요? 초조함이에요. 왜 난 안 될까, 왜 이렇게 못할까, 이런 생각을 하면 수영이 재미없어져요. 그저 동작을 몸이 기억하도록 꾸준히 하다 보면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수영이 될 거예요. 한… 5년 후에!” 위로받는 기분으로 고개를 주억거리며 듣던 나는 5년 후라는 말에 물안경 밖으로 눈이 튀어나올 만큼 놀랐다. 5년이라니요? 말도 안 되게 긴 시간을 부르시는 선생님의 말씀에 웃음이 터졌다. 그때 갑자기 깨달았다. 내가 너무나 직장인적인 마인드로 성과 우선주의에 빠져 있었다는 사실을. 일정량의 재화나 공력을 투자하면 곧장 아웃풋이 나와야 마음이 편했다. 강습료를 내고 시간을 투여하는데 평영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답답했다.

하지만 실력이 늘지 않는다고 이 시간이 무의미한 낭비인가? 그렇지 않았다. 나는 지난 한 달의 수영을 반추했다. 수영장으로 가는 길, 여름 햇살을 맞으며 걷다 보면 땀이 배기 시작하고 어서 물에 들어가고 싶다고 중얼거리게 되곤 했다. 몸을 씻고 설레는 마음으로 풀에 입장하면 나를 맞아주는 거대한 사각형의 물이 일렁거렸다. 발끝부터 정강이, 허벅지 순으로 몸을 담그면 열기를 머금은 몸을 수천 개의 차가운 팔이 안아주는 것 같았다. 물안경을 끼고 고개를 담그면 수영장 바닥에 빛의 그물이 파랗게 일렁거렸다. 옆 사람이 일으킨 물보라가 잔거품이 되어 내 얼굴을 간지럽혔다. 그 모든 시간은 평화이고 치유이고 명상이었다.

그래, 5년이나 걸린다는데 한 달 차인 나의 초조함이 우스웠다. 그렇게 몸에 힘을 빼고, 되면 되고 말면 말고의 마음으로 수영에 임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평소처럼 그저 허우적거리고 있는데 문득 발바닥을 단단하게 받쳐주는 물을 느꼈다. 내가 동작을 어찌 달리했는지도 모르겠는데 정말 어느 순간, 마법처럼 나의 발바닥이 힘차게 물을 밀어내고 있었다. 내가 평영에 성공한 것이다.

홍인혜 시인·웹툰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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