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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룸에서-권기석] 강제동원 해법, 피해자부터 만나야



일제 강제동원 문제의 해법으로 ‘1+1’이니 ‘2+1’이니 하는 방법이 거론되고 있다. 1+1은 한국기업과 일본기업이 돈을 내 피해자에게 위로금을 지급하자는 것이고, 2+1은 여기에 한국 정부를 포함하자는 구상이다. 어떤 구상이 됐든 지금 단계에서는 성급하고 적절하지 않다. 먼저 이 구상들이 강제동원 피해자와 충분한 협의를 거쳐 나온 것인지 궁금하다. 노영민 청와대 비서실장은 지난 6일 국회 운영위원회 회의에서 “피해자들과 발표해도 될 수준의 합의가 있었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틀 뒤 강제동원 피해 소송을 대리해온 최봉태 변호사는 “앞으로 해야 할 일을 과거형으로 말한 것 같다”며 이를 부인했다. 청와대의 인식과 달리 피해자 측에서는 충분한 협의가 이뤄지지 않았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피해자와의 협의가 중요한 이유는 과거 역사가 말해준다. 지금 한·일 갈등의 근원은 1965년 맺어진 청구권협정이다. 대법원이 2012년과 2018년 판결에서 강제동원 피해자의 개인 청구권이 살아 있다고 판단을 내렸지만 이 문제는 협정 체결 이후 반세기 넘게 논란의 대상이었다. 그 이유는 애초 협정에서 청구권의 정의와 행사 범위를 똑 부러지게 규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촘촘하지 못한 협정문은 일본이 ‘개인 청구권을 인정할 수 없다’는 주장을 할 수 있도록 빌미를 제공했다. 협정이 불완전했던 근본적 원인은 박정희 정권이 강제동원 피해에 관한 진상조사도, 피해자와의 대화도 없이 청구권 협상에 나섰기 때문이다. 부족한 집권의 정당성을 경제 발전으로 메우려 했던 군사정권은 강제동원 피해자의 규모가 얼마인지, 받지 못한 임금이 얼마인지 조사도 하지 않고 엉터리로 협정을 맺었다.

2018년 대법원 판결문에는 김재형·김선수 대법관의 보충의견으로 이런 대목이 있다. “대한민국 정부와 일본 정부가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정신적 고통을 지나치게 가볍게 보고 그 실상을 조사·확인하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은 채 청구권협정을 체결한 것일 수도 있다.” 피해자들이 어떤 고난을 겪었는지 알지 못하고 체결한 협정은 한동안 피해자의 손발을 묶는 족쇄가 됐다.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도 마찬가지다. 합의의 산물인 화해치유재단이 해산된 것은 정권이 바뀌어서가 아니다. 박근혜정부가 피해자와 충분한 협의 없이 덜컥 합의부터 했기 때문이다. 피해자들은 진정한 사죄를 원했지만 정부가 받아온 것은 몇 마디 사과와 재단 출연금 10억엔뿐이었다. 피해자의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체결한 합의는 문제 해결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89년 시작된 사할린 강제동원 피해자 등의 영주 귀국 사업은 피해자 중심으로 진행되지 않아 또 다른 비극을 초래했다. 과거 정부는 이 사업을 시작하면서 영주 귀국 대상을 45년 8월 15일 이전 출생자로 제한했다. 그 결과 1세대인 부모와 현지에서 태어난 자식 간 생이별이 잇따랐다. 한국에 와서도 사할린에 남은 가족을 그리워하다 세상을 떠났거나 다시 사할린으로 돌아간 피해자가 많다. 자식과 살기 위해 영주 귀국을 포기한 강제동원 피해자도 적지 않다.

해방 이후 한·일 역사 갈등이 계속되는 것은 전적으로 일본의 책임이지만 피해자 입장에서 문제에 접근하지 않은 우리 정부의 책임도 작지 않다. 이제 강제동원 피해자는 대법원에 의해 떳떳하게 위로금을 요구할 수 있는, 불법 식민지배의 피해자로 인정받았다. 정부는 1+1, 2+1 어떤 구상을 하든 피해자부터 만나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들어야 한다.

피해자를 만났을 때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사죄의 개념이다. 피해자가 사죄를 원한다고 해서 아베 신조 총리가 공식 석상에서 몇 마디 하는 것으로 문제가 해결된다고 생각해선 안 된다. 사죄에는 재발 방지를 위한 실천이 잇따라야 한다. 이 실천에는 가해자의 후세대 교육과 기념사업이 필수다. 진상 규명을 위한 자료 제공과 협조, 사망자의 유골 봉환과 위령 사업도 당연히 포함돼야 한다.

권기석 사회부 차장 key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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