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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리사니-이경원] 어떤 마이너의 공직생활



2000년 2월 김대중 대통령의 임명장을 받고 35세에 검사로 임관할 때, 박광배 검사는 “5년 버티면 잘한 거겠구나” 생각했다 한다. “나이도 많고, ‘스카이’ 출신도 아니고, 누가 봐도 ‘마이너’였죠.” 그는 20년 가까이 버틴 뒤 서울남부지검 증권범죄합수단장을 끝으로 최근 사직했다. 마이너를 이만큼 데려와 줬다며 그는 국가에 고마워했다. 이젠 가장 노릇을 하겠다고 했다.

그는 매일같이 혼나는 검사였다. 초임으로 인천지검 형사부에 갔더니 수석·차석검사만 빼고 모두 동료·선배 넷이 동갑이거나 어렸다. “김 검사님” 하고 불렀더니 “선배님이라 부르라”는 불호령이 떨어졌다. 3년 차 때 경주지청에서는 지청장에게서 “소극적인 검사로 살 거냐”는 호통을 들었다. 무허가 카지노 피해를 언급한 진정 사건을 어찌 처리할지 몰라 끙끙대다가, 이웃인 포항지청이 사건을 치고 나간 탓이었다.

5년을 버티자 조금 눈이 틔었다. 그는 안산지청에서 서울경찰청 사이버수사대 팀장이 경마 도박 사이트를 운영한 희한한 범죄를 밝혀냈다. 경위인 그 팀장은 압수수색영장을 신청해 스스로를 수사해둔 상태였다. 압수수색한 물건은 사업자등록증 달랑 하나, 경기청과 충북청 경찰이 그 도박 사이트를 수사한다 하면 경위는 “이미 수사 중이다. 손 떼라”며 위기를 넘겼다.

모두가 끝난 사건이라 할 때 박 전 검사는 도박 사이트 회사가 쓴 직불카드들을 지역별로 다시 살폈다. 유독 몇 천원 단위의 소액결제가 잦은 데가 있었는데, 경위의 자택 근처였다. 경위가 동료 경찰의 수사를 방해한 것은 위계공무집행방해죄로 인정됐다. 박 검사는 그때 특수수사를 알게 됐다고 한다.

이후엔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에서도 일했으니 선망받는 ‘특수통’의 삶 아니었을까. 그는 “서글픈 순간이 많았다”고 말했다. 2009년 그의 2살 난 늦둥이 아들은 신종플루로 응급실에 입원했다. “폐가 새까맣게 변해 위험하다”는 소식을 듣고도 그는 퇴근할 수 없었다. 자정이 다 돼 병원에 달려간 그는 아마 어딘가에 화를 내고 싶었을 것 같다. 맡길 곳이 없었던 초등학생 딸도 신종플루 환자들이 기침을 쏟아내는 6인 병실 안에서 놀고 있었다.

법무부 감찰담당관실에서 일하던 2013년에는 아내가 수술 받을 일이 있었다. 휴가를 꿈꾸지 못하던 그는 매정하게도 “추석 연휴 직전에 수술을 받자”고 말했다. 채동욱 검찰총장의 혼외자 사건은 하필 연휴를 앞두고 터졌다. 추석 당일 새벽에 아이들이 있는 대전 집에 밥을 해놓고 다시 법무부로 차를 몰면서, 그는 핸들을 잡고 울었다.

그는 ‘빵점 가장’의 반성을 수사에 투영했던 듯하다. 누굴 조사한 일이 가장 기억나느냐 물었더니 그는 국회의원을 말하지도, 재벌을 말하지도 않았다. 대신 이름 모를 한 안테나 중계탑 사업자를 말했다. 횡령 혐의가 있는 그 사업자의 집에 압수수색을 나가 보니 그는 정신착란 증세를 보이는 아내와 딸을 돌보고 있었다. 수사관 일행을 본 그 사업자의 부인이 “남편을 빨리 잡아가라”고 소릴 질러댔다. 극단적 선택이 우려된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박 검사는 고민하다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9시까지 검찰청에 잠깐 들어와라. 나랑 얘기나 하자.” 박 검사는 횡령액 변제를 전제로 “당신을 불구속 기소할 테니 혹시라도 딴 맘 먹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구속 욕심내지 않고 사람을 하나 살렸다. 지금도 잘한 일이라 생각한다.” 그는 자녀를 둔 가장을 체포할 일이 있으면 아이들 등교 뒤에 하라고 수사관들에게 당부했다. 피의자 자녀가 수험생인데 수능일이라서, 영장이 나왔지만 강제수사를 미룬 일도 있다.

그의 사직을 두고 말이 많았다. 스스로는 “경제적 이유 때문임을 부정하지 않겠다”고만 했다. 검사의 월급은 서울에 집을 마련하지 못했고 가족은 지방으로 이사를 반복했다. 책상 위에서 다른 가장들의 운명을 결정했고 숨 쉴 때조차 조심해야 하는 삶이었다. 어느 날은 뒷차가 접촉사고를 냈는데, 그는 대나무가 그려진 검찰청 주차증부터 앞유리에서 떼어냈다. 5년 목표가 20년으로 늘었을 뿐 그는 한시를 읊으며 떠나지도 않았다. 박 검사는 “뭔가를 짊어지고 있었다는 것을 이제 깨달았다”고 했다. 그 짊어진 것은 아마 ‘공직’이었을 것이다. 내려놓는 이들이 더 행복하다 하는데, 또 많은 이들이 한사코 그 짐을 지려 한다.

이경원 사회부 기자 neosar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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