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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윰노트-김윤관] 사라진 물건들의 세상



물건이 넘쳐난다. 이미 과잉의 증거는 충분하고 비판의 목소리는 상투적일 정도로 일반화되어 있다. 하지만 도로의 택배차량은 반비례해 빠르게 늘어나고 있다. 누군가 무소유에 대한 책을 읽는다. 읽는 동안 두세 번의 택배를 받는다. 다음 날 그는 전날 택배로 받은 옷과 신발을 신고 단순한 삶에 대한 강의를 들으러 간다. 귀가하는 길, 그는 편의점에 들른다. 모순, 이란 단어가 절로 떠오르는 풍경이다.

인류 역사상 어느 시대보다도 더 많은 물건을 소유하며 살고 있는 이 시대에 왜 사람들은 맹목이라는 단어가 생각날 정도로 더 많은 물건을 사고 모으며, 그것을 위해 삶의 많은 부분을 소비하는 것일까. 가구라는 물건을 만드는 목수인 나는 세상의 많은 문제를 ‘물건’이라는 키워드로 풀고 이해한다. 파랑새가 결국 내 집 안에 있었던 것처럼 사람들의 불안, 소외, 고독 역시 내 옆에 늘 있는 ‘물건’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이해하려고 한다.

미국의 작가 돈 라펠은 “물건의 가치가 실용적 쓸모 혹은 심미적 아름다움에서 온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개인이 소유하고 있는 물건에는 시간이 갈수록 감정적인 가치가 더해진다”고 말한다.

‘감정적 가치’. 사람들이 물건에 맹목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그들을 충족시키는 물건이 없다는 의미로 읽힌다. 돈 라펠의 말처럼 물건은 쓸모와 심미적 아름다움을 양 축으로 한다. 수많은 기업과 디자이너, 작가들은 이 두 요소가 완벽하게 조화된 제품을 만들고자 애쓰고 있다. 하지만 거기까지. 소유자가 더 이상 비슷한 물건을 욕망하지 않는 하나의 자족한 물건이 되기 위해 그들이 할 수 있는 역할은 거기까지이다.

어린 시절을 회상하게 하는 물건들이 한두 개쯤은 있다. 내게는 제사 때 쓰이는 목기가 그렇다. 지나치게 가난했던 어린 시절, 셋집이 개발되면서 받은 ‘딱지’를 판 돈으로 어머니가 샀던 목기가 있다. 목기는 당시에는 더 비싼 물건이어서 그 목기를 살 때 어머니에게 얼마나 큰 망설임이 있었을지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이제는 군데군데 칠이 벗겨지고 깨진 목기지만, 그 목기를 볼 때마다 달동네의 단칸방에서 차례와 제사를 지내던 가족의 모습과 냄새, 목소리가 들려 눈이 붉어진다.

무형문화재가 만든 더 쓸모 있고 더 아름다운 목기를 살 수 있지만, 나는 여전히 그 목기로 부모님의 제사를 지내고, 그때마다 소중함을 깨닫지 못하고 지나쳐버린 시절을 생각한다. 아무리 비싼 목기도 칠이 벗겨지고 모서리가 깨진 그 목기를 대신할 수 없다. 나는 아마 죽는 날까지 목기를 사지 않을 것이다. 그 목기에는 쓰임과 심미보다 더 중요한 나의 감정적 가치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나는 목수다. 가구를 만든다. 몇 달의 고민과 노동을 거쳐 한 점의 가구를 만든다. 하지만 그 가구가 누군가의 집에 들여져 어느 정도의 수명을 가질지 짐작할 수 없다. 내게 테이블을 산 사람은 어쩌면 몇 년 후 내가 만든 테이블을 버리고 유명 가구 회사의 테이블을 살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할 때마다 마음 한쪽이 무겁다. 필부에 불과하지만, 한 사람의 삶과 노고가 쉽게 쓰이고 가벼이 버려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흔쾌할 수는 없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더 쓸모 있고, 더 심미적인 가구를 만드는 일뿐이다. 내 가구를 살 사람의 ‘감정적 가치’가 오롯이 잘 담길 수 있는 바탕을 만들 뿐이다. 그 이상 내가 할 일은 없다.

아는 사람이 천 명쯤 있어도 나의 감정과 시간이 나눠진 사람 한 명이 없다면 외로울 수밖에 없다. 천 명의 전화번호 속에서 소외를 느끼고 고독을 느낀다. 다시 천 명의 전화번호를 더한다 하더라도 해결되지 않는다. 친구라 말할 수 있는 단 한 명이 있다면, 아흔아홉 명의 전화번호는 필요 없을지도 모른다.

물건도 그렇다. 내 삶과 기억이 함께하는 물건이 되지 않는다면, 끊임없이 새로운 물건을 찾아 나설 것이다. 찾아 나설수록 갈급을 느낄 것이다. 좋은 물건을 사고, 그 물건을 쓰고, 바라보고, 쓰다듬으며 감정적 가치를 만들지 않는다면 무소유 혹은 단순한 삶은 지난할 것이다. 무소유나 단순한 삶은 단지 행위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마음이 정렬된 방식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물건이 가득한 세상이다. 하지만 물건이 보이지 않는다. 물건이 사라진 세상이다.

김윤관 김윤관목가구공방 대표목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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