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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 광복절을 잊은 교회



새하얀 태극기가 단상 위 십자가 아래 세워져 있었다. 원로목사님이 오랜만에 마이크를 잡고 설교를 했다.

“창씨개명과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학교에서 쫓겨나자 이제는 징병이 시작됐습니다. 일제의 총알받이가 될 순 없어서 산속에 굴을 파고 숨었습니다. 어쩌면 평생을 숨어 살아야 할지도 몰랐습니다. 굴속에서 하나님께 기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느 날 어머니가 찾아와 말씀하셨습니다. ‘얘야, 일본이 항복했다. 우리가 해방됐다.’ 해방은 도둑처럼 찾아온 벼락같은 축복이었습니다. 우리 민족의 통일도 이처럼 도둑같이 이뤄질 줄 믿습니다.”

찬송가 대신 애국가를 불렀다. 후렴구의 하느님은 ‘하나님’으로 바꿨다. 원로목사님과 은퇴하신 장로님들이 함께 서서 “대한독립 만세”를 앞서 외치고 온 교인이 다 함께 “만세 만세 만세” 삼창을 부르면 예배가 끝났다.

나의 모교회인 부산 소정교회에서는 광복절 때면 이렇게 기념예배를 드렸다. 광복절이 주일이 아니어도 교회에 모여 예배를 드리고 만세삼창을 불렀다. 광복을 직접 체험한 김두봉(1924~2006) 원로목사님이 돌아가셨기에 더 이상 설교 강단에서 그 감격과 감사를 증언할 사람이 없는 게 안타깝다.

해방이 ‘도둑 같이 왔다’ ‘하늘이 준 떡이었다’고 한 것은 한국교회의 보편적인 고백이었다. 함석헌 선생은 이렇게 설명했다.

“이 해방에서 우리가 첫째로 밝혀야 하는 것은, 이것이 도둑같이 뜻밖에 왔다는 것이다.…이 나라가 해방될 줄 미리 안 사람은 하나도 없다. 알기는 그만두고 믿은 사람도 없었다. 믿었다면 무지한 민중이 무지해서 무지하게 막으로 믿었지, 학식깨나 있고 밥술이나 먹고 몸맵시라도 매끈히 내고 다니는 놈에게는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해방은 하나님이 주신 축복이었고 감격스러운 선물이었다.

‘이 해방은 하늘에서 온 것이다. 아무도 모른 것은 아무도 꾸민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이 꾸미지 않고 온 것은 하늘의 선물이다. 아무도 공로를 주장할 중간적인 자가 없다. 뜻밖이니만큼 기쁨이 더 크다. 이것은 아마 섭리가 우리가 기뻐하는 것을 보자고, 그리하여 착한 마음이 저절로 소성되는 것을 보자고 일부러 하신 일이다.’(‘뜻으로 본 한국역사’ 중에서)

지난 11일은 여러 기독교단에서 정한 광복 기념주일이었다. 많은 기독교 단체들이 성명서나 기도문을 발표했다. 그뿐이었다. 대부분의 교회에선 의례적인 설교나 기도, 아니면 그마저도 언급하지 않고 지나갔다. 해방의 감격을 증언할 세대가 교회에서도 사라지고 있다. 광복 기념주일은 어린이주일 어버이주일보다 더 조용히 지나가는 의례적인 절기가 돼 버렸다.

기억하는 일은 귀찮다. 오늘 닥친 일을 감당하기도 버겁기 때문이다. 뒷방 늙은이의 옛날이야기에 귀 기울일 여력이 없다. 그런데 왜 성경은 “옛날을 기억하라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 네 아버지에게 물으라. 그가 네게 설명할 것이요 네 어른들에게 물으라 그들이 네게 말하리로다”(신 32:7)라고 하는 걸까?

역사를 잊으면 거짓이 들어오기 때문이다. 일본은 우리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하고 교회종을 떼어서 무기를 만들었는데, 그런 일본을 두고 ‘일본의 은혜를 알아야 한다’고 설교하는 교회가 있다고 한다. ‘강제징용을 지시한 문서가 없으니 이는 거짓이다. 종군위안부는 자영업자였다’는 주장을 담은 책이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당사자의 증언과 체험이 있는데도 왜곡된 기억이라고 윽박지른다. 해방의 감격이 잊혀진 자리에 ‘해방도 식민통치도 일본이 베푼 은혜’라는 주장이 들어온 셈이다.

“너는 애굽에서 종 되었던 일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거기서 속량하신 것을 기억하라.”(신 24:18)

구약성경은 해방의 감격도 노예살이의 고통도 잊지 말라고 수없이 강조한다. 하나님이 해방자이심을 기억하지 못하면 이스라엘이 다시 망할 것이라고 강조한다. 남녀노소가 한자리에 모여 누룩 없는 빵을 씹고 출애굽기를 함께 읽으라고 아예 법으로 정했다.

역사의 주인은 하나님이고 역사를 잊으면 하나님도 나라도 생명도 잃게 된다는 것을 이스라엘은 알았기 때문이다.

김지방 미션영상부 차장 fatty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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