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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돋을새김-고승욱] 최저임금, 뭐라도 해보라



최저임금이라는 말이 주는 느낌은 비장하다. 가장 먼저 연상되는 단어는 가난, 착취, 인간적이지 못한 삶이다. 가혹한 노동에 시달리는 비참함, 정당한 대가를 받아야 한다는 절박함이 녹아 있다. 우리나라 산업화의 역사가 실제로 그랬다. 최저임금을 최대한 인상하라는 주장은 독재에 저항하며, 탐욕스러운 기업주에게 휘둘리지 말고 정의를 실현하라는 요구와 같은 뜻이었다. 많은 사람이 오랫동안 그렇게 생각했다. “취임 3년 내 최저임금 1만원 공약을 달성하지 못한 것을 매우 안타깝고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는 문재인 대통령의 말에서도 어렵게 사는 저소득층, 제대로 된 직장을 구하지 못한 채 아르바이트로 힘겨운 하루를 보내는 청년들에게 미안해하는 마음을 읽을 수 있다.

그렇지만 이제는 최저임금이라는 말에서 이런 문학적 함의를 걷어낼 필요가 있다. 2019년 우리의 경제적 위치는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배경이었던 1970년대와 많이 다르다. 최저임금 인상만이 인간답지 못한 삶을 극복하는 유일한 탈출구는 아닌 것이다. 기업에 최저임금은 임금이라는 명목으로 지출되는 비용의 크기를 결정하는 기준점이다. 노동계도 다르지 않다. 가족수당, 통근수당, 급식수당같이 기본급에 포함되지 않는 각종 수당이 난수표처럼 얽힌 임금체계가 획기적으로 바뀌지 않는 한 연봉 5000만원이 넘는 노동자도 최저임금 인상률의 직접적인 영향권에 들어간다. 최저임금 인상률 결정은 개별 사업장을 뛰어넘어 벌어지는 또 다른 임금협상으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다. 시간이 흐르면서 열악한 환경에서 저임금에 시달리는 노동자를 보호한다는 최저임금의 존재 의미마저도 가중치가 달라졌다. 올해 최저임금위 공익위원들은 최저임금 수준이 중위임금 대비 60% 수준에 달했음을 전제로 적정임금 인상률을 산출하는 데 주력했다고 했다. 최저임금 인상률, 심지어 인상 여부는 선과 악의 대결이 아니라 노동생산성과 물가, 경기에 상호 영향을 주는 경제적 의사결정 행위임을 더이상 부인할 수 없게 됐다.

이렇게 생각하면 지금의 최저임금 결정 방식은 이해하기 어렵다. 수시로 바뀌는 경제상황을 유연하게 따라잡지 못한 채 경직돼 있기 때문이다. 최저임금이 2018년 16.4%, 2019년 10.9% 오르자 시장은 크게 요동쳤다. 자영업자와 영세소상공인에게서 비명이 터져나왔다. 보수언론이 과장했을 수는 있지만 없는 일을 지어낸 것이 아니다. 편의점을 경영하는 친구의 거친 말이 경제관료들이 제시하는 세련된 통계수치보다 훨씬 설득력이 있다. 저임금에 기대 연명하던 구조적 문제를 들며 “진작에 구조조정하라고 했지 않았느냐”라고 훈계만 할 일도 아니다. 이미 학계에서는 최저임금의 경제적 효과를 놓고 찬반 논쟁이 분분하다. 최저임금을 많이 올리는 것이 고용창출에 도움이 되는가, 저소득층의 실질소득은 늘었는가, 최저임금을 보장받지 못하는 불법적 상황은 얼마나 줄었는가. 대답은 학자마다 다르다. 그만큼 사회가 복잡하고, 경제가 다변화됐다는 뜻이다.

정부는 지금까지 해오던 방식대로만 하려고 한다. 2017년 12월 최저임금위 제도개선TF가 제시한 업종별 차등적용 주장에 대한 검토의견은 이렇다. ‘업종별 차등적용의 타당성을 찾기 어렵다. 시행 첫해 외에는 단일 최저임금을 유지해온 것이 이를 반영한다.’ 합리적 기준과 통계인프라가 없다는 이유도 있다. 하지만 동의하기 어렵다. 제 할 일을 하지 않고, 과거에 할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앞으로도 일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격이기 때문이다. 농촌에서는 최저임금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고 아우성치는데 지역별 차등적용은 지역균형발전을 저해하는 ‘낙인효과’ 때문에 안 된다고 한다. 문제가 있으면 무엇이라도 손을 대 고칠 일이다. 생각과 해법이 서로 다르다고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은 곤란하다. 내년 이맘때 올해와 똑같은 일이 또 벌어질지 모르겠다. 정말 그렇게 된다면 ‘무능한 정부’일 뿐이다.

고승욱 편집국 부국장 swko@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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