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랑비가 내리니
갑자기 오후가 갠다.
내리다인지 내렸다인지.
분명 비는 과거에 일어나는 일이지.
빗소리를 듣는 이는
그지없는 행운이
장미라 부르는 꽃과 유채색 신기한 색조를
현현시켰던 그 시간을 회복하였네.
유리창을 눈멀게 하는 이 비가,
상실된 아라발의 지금은 가 버린 어느 정원 포도 덩굴
검붉은 알갱이에 생기를 돋우리.
젖은 오후는 내가 갈망하던 목소리,
죽지 않고 회귀하는
아버지의 목소리를 들려주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창조자’(민음사) 중
아르헨티나 작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1899~1986)는 소설 시 평론 에세이를 넘나들며 셀 수 없는 명작을 쏟아냈고, 결국엔 20세기 문학사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 됐다. 보르헤스는 1923년 첫 책이자 시집인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열기’를 내놓고 2년 뒤에도 시집 ‘정면의 달’을 발표했는데, 그 뒤로 약 30년간 시를 거의 쓰지 않았다. 그가 시 창작의 세계에 다시 들어온 건 시력을 상실한 55년쯤부터다. 위에 적힌 ‘비’의 3연에 등장하는 ‘아라발’은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변두리 동네를 가리키는 단어. 올여름 “유리창을 눈멀게 하는” 비가 내리면 이 시를 떠올려보셨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