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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샛강에서-김준동] 정권에 따라 춤추는 자사고



1974년 고교 평준화가 실시된 이후 역대 정권은 학교 선택권을 부여할 방안에 대해 고민했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2001년 자립형사립고다. 현재 논란의 중심에 있는 자율형사립고(자사고)의 뿌리다. 자사고가 전국적으로 확산된 시기는 이명박정부 때다. 2008년 2월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 인수위원회가 발간한 백서에 따르면 “기숙형 공립고 150개, 마이스터고 50개, 자율형사립고 100개 등 300개의 다양화된 고교를 만들어 학생들의 학교 선택권을 확대하고 동시에 농어촌 지역의 고교를 활성화하며, 전문계 고교의 발전 모습을 보여주겠다”고 했다. 이른바 ‘고교 다양화 300프로젝트’다. 수요자인 학생들이 일률적인 학교 교육을 받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적성에 따라 창의적으로 배우고 스스로 진로를 정할 수 있도록 하자는 취지다.

‘개천에서 용을 나게 하는’ 일반고는 자사고와 순기능적으로 병존하면서 몇 년 동안 크게 문제 되지 않았다. 하지만 자사고는 신자유주의적인 교육정책의 확산과 본래 취지에서 벗어난 교육 과정으로 계층불평등 구조를 심화시켰다. 사교육 조장과 고교 서열화 문제가 불거지면서 2000년대 중반부터 자사고·외고 폐지론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국어 영어 수학 위주의 집중·심화 수업으로 명문대 진학의 통로로 전락했다는 비판이 일었기 때문이다. 2013년 한국교육개발원이 발간한 ‘고교 다양화 정책의 성과분석 및 개선방안 연구’에 따르면 자사고 학생들에게 학교를 선택한 이유를 물어보니 ‘장차 대학 진학에 도움이 될 것 같아서’라는 이유가 전체의 35%로 1위였다. 2017년 서울대 합격자들 중에서 자사고 출신은 18.7%이고 외국어고, 과학고와 같은 특성화고교 출신은 15.7%였다. 순수 일반고가 차지하는 비율은 53%에 불과하다.

폐지와 유지론이 정면충돌한 것은 박근혜정부 때다. 시·도교육청을 대거 장악한 진보 교육감들이 고교 서열화와 사교육 과열 등을 들어 자사고·외고 폐지를 들고나오자 박근혜정부는 자사고 지정 또는 지정 취소 시 교육부 장관과 ‘협의’하게 돼 있었던 초·중등교육법 시행령을 2014년 교육부 장관의 ‘동의’를 얻도록 개정해 버렸다. 진보 진영의 반발은 거셌지만 보수 정권의 자사고 지키기는 완강했다. 문재인정부 들어 상황은 180도 달라졌다. 문재인 대통령의 핵심 교육 공약이 자사고·외고 폐지였기 때문이다. 김상곤 전 교육부 장관과 진보 교육감들이 폐지에 힘을 실으면서 자사고와 외고는 존폐의 기로에 놓였고 해당 학교 및 학부모는 강하게 맞섰다. 교육단체들도 이념에 따라 찬반 의견을 달리 내놓으면서 팽팽한 줄다리기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진보 측은 ‘다양성 교육’은 다양한 방법으로 대학에 더 잘 진학할 수 있는 교육으로 전락했다고 주장하고 있는 반면, 보수 측은 강남 8학군 부활과 공교육 획일화 등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우려하고 있다.

교육 논쟁이 불거질 때마다 거론되는 나라는 핀란드다. 세계적으로 정평이 난 핀란드 교육은 1968년부터 진행된 교육개혁을 통해 그 기틀이 마련됐다. 핵심 교육과정을 결정하는 역할을 맡은 국가교육위원회를 진두지휘한 인물이 에르키 아호 전 국가교육청장이다. 그가 교육청장을 지낸 20년간 정권이 수없이 교체됐지만 정치권은 그에게 교육개혁의 지휘봉을 변함없이 맡겼다. 핀란드 교육의 기조는 이 시기에 마련돼 5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일관되게 추진되고 있다. ‘교육 시스템은 철저한 준비를 통해 점진적이고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결정된 정책의 성공을 위해 일관성 있는 추진과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는 것이 핀란드 교육 개혁의 핵심이다.

우리는 어떤가. 자사고 폐지 논란에서도 보듯 교육 정책은 학생과 학부모 입장에서 논의가 진행되기보다 언제나 정치적 입장에 따라 좌지우지됐다. 정책이 정치 논리에 따라 흐르게 되면 결국 직접적인 피해는 학생과 학부모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 입시제도는 1945년 광복 후 큰 틀만 무려 18차례나 변경됐다. 평균 4년도 버티지 못한 셈이다. 정권마다 교육 실험을 반복하다보니 ‘교육 실험쥐’라는 말까지 나온 지 오래다. 언제까지 정권과 영혼 없는 공무원들의 희생양이 우리 아이들이어야 하는가. 실험쥐 신세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는 학생들의 아우성이 들리지 않는가. 백년대계(百年大計)는 바라지도 않는다.

김준동 공공정책국장 겸 논설위원 jd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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