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오피니언  >  칼럼  >  기타

[박형준 칼럼] 신냉전체제와 내셔널리즘



미·중 간 첨단 기술경제의 충돌이자 이데올로기의 충돌이 신냉전체제의 본질
미국이 각자도생의 내셔널리즘 앞세우자 일본도 편승

정부는 민족주의로 맞불 놓을 게 아니라 외교력 발휘해야


현대 세계 정치경제의 역사는 크게 세 단계를 거쳐 왔다. 첫 단계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다. 이때 과학기술 혁명이 세상을 바꾸어놓았다. 전기, 자동차, 비행기, 알루미늄, 뢴트겐, 백신 등이 상징하는 기술 혁신이 세계 경제를 크게 성장시켰다. 1900년부터 1920년까지 세계 경제성장률은 연평균 3%를 넘었다. 이때 힘을 앞세운 극단적 내셔널리즘이 창궐했고. 결국 제1차, 2차 세계대전이라는 비극을 경험했다.

둘째 단계는 대공황과 2차대전을 거치며 형성된 전후 포드주의체제다. 내구소비재를 중심으로 한 대량생산, 대량소비와 더불어 생산성 임금제, 노사 타협, 자유민주주의가 대세였고, 성장과 복지 두 마리 토끼를 잡았다. 60년대 세계 경제성장률은 역사상 최고인 5%에 달했다. 이 시기는 체제 대결 속에 글로벌리즘과 내셔널리즘이 양립했다.

세 번째 단계는 80년대 이후다. 이 질서는 자유질서(liberal order)였다. 레이거노믹스로 명명된 투자와 혁신 중심의 공급 사이드의 경제학이 지배했고, 가치 사슬로 연결된 국제 분업이 고도화됐다. 또 80년대 초 가장 큰 골칫거리였던 인플레이션이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의 금리 정책을 매개로 잡혔다. WTO체제 확립으로 무역 장벽은 낮아졌다.

아울러 세계의 시공간을 직접 연결하게 만든 정보통신 혁명이 그 자체로 ‘자유의 파동’을 일구어내었다. 이 시기에 글로벌리즘이 내셔널리즘을 압도했고, 중국과 인도 등 거대 국가를 포함한 신흥국 성장이 본격화된다. 그 결과 세계 경제성장률은 21세기 첫 10년에 4%를 찍었다. 게다가 90년대 소련까지 붕괴해서 그야말로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말했듯 세계는 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로 동질화된 글로벌 빌리지를 역사의 종착역으로 삼는 듯했다.

그러나 확실히 역사는 외길을 가지 않는다. 후쿠야마의 예언 이후 약 30년이 지난 지금 글로벌리즘이 후퇴하고 내셔널리즘이 부상한다. 자유 질서에 제동이 걸리는 현상이 곳곳에서 표출된다. 자유민주주의의 확산은 순조롭지 않고, 포퓰리즘은 준동한다. 하지만 길게 보면 이것은 세계 정치경제의 다음 단계로의 진입과 더 큰 자유 질서를 위한 진통일 수 있다.

이 진통을 불가피하게 만드는 두 원천적 요인이 있다. 하나는 인공지능 디지털 혁명으로 규정되는 첨단 기술 경쟁의 특성에서 비롯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일종의 유사 ‘문명 충돌’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이전의 국제 분업은 수직적으로 계열화된 분업의 성격이 강했다. 여러 분야의 생산성이 함께 올라가는 구조였다. 하지만 지금은 일부 첨단 분야에서는 생산성이 높이 올라가는 반면, 대부분 영역에서는 생산성이 정체하는 이중 구조를 뚜렷이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사활이 걸린 경쟁은 인공지능, 신세대 통신망, 사물인터넷, 양자컴퓨팅 등 미래 기술 분야에서 이루어진다. 미국 입장에서는 자유무역 질서보다 중요한 것이 첨단 기술 분야의 우위를 유지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가장 중요한 경쟁자로 중국이라는 대국이 부상한다. 첨단 기술을 잡아먹는 데 이 나라는 수단을 가리지 않는 포식자다. 이를 뒷받침하는 체제와 권력은 ‘자유의 가치’보다는 ‘전체주의’에 경도된다. 당연히 자유 없는 체제가 세계를 주도할 첨단 기술 최강국이 되는 것을 막는 게 미국에는 1순위 국가 전략이 될 수밖에 없다. 신냉전체제의 본질은 여기에 있다. 첨단 기술경제의 충돌이자 이데올로기의 충돌인 것이다. 코카서스산맥 서쪽과 동쪽의 문명 충돌로 은유할 수도 있다.

신냉전체제의 구조적 불가피성에도 불구하고 트럼프 정부가 일을 하는 방식은 논쟁거리다. 새로운 자유 질서를 위한 미국의 행동이 너무 독단적이라는 논란이다. 헨리 키신저나 조지프 나이는 트럼프가 기후변화나 중국 문제, 이란 문제 등을 다루는 데 동맹의 중요성을 간과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아무리 셰일가스가 펑펑 나오고, 아쉬운 것 없는 나라라 하더라도 미국이 각자도생의 내셔널리즘을 앞세워 전통적 동맹 국가들을 옥죄는 것은 새로운 위협을 막는 데도 도움이 안 되고 소프트파워만 갉아먹는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트럼프는 레이건에게 더 많이 배워야 한다. 레이건은 자유 질서를 각자도생이 아니라 ‘자유동맹체제’를 강화하는 것을 통해 추진했고 성공했다.

각자도생의 내셔널리즘은 이전 ‘자유 질서’의 가장 큰 수혜자인 한국과 같은 나라에 큰 시련을 안긴다. 고개를 들고 있는 ‘핵 동결론’도 미국과 한국의 이익이 분리될 수 있는 위험을 안고 있고, 일본의 ‘한국 막 다루기’도 이런 시류에 편승한 것이다. 상대적으로 취약한 한국의 입장에서 내셔널리즘으로 맞불을 놓는 것은 하책일 수밖에 없다. 자유동맹체제라는 전략적 관점을 확고히 하고 미국과 일본이 한국의 국익을 쉽게 훼손하지 않도록 막는 데 집중해야 한다. 외교력이란 말은 이때 필요한 것이다. 유능한 정부냐 무능한 정부냐도 여기서 갈라진다.

박형준(동아대 교수·전 국회사무총장)
 
트위터 페이스북 구글플러스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