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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시각-권혜숙] 헌책방의 새로움



한눈에도 꽤 낡아 보이기는 했지만, 책은 1864년 영국 런던에서 출판된 것이었다. ‘로빈슨 크루소의 모험’ 표지 안쪽에 붙어 있는 종이를 보면 이 책은 레드크로스 스트리트 스쿨에 다니는 H 프라이라는 학생이 ‘품행이 방정하고 출결이 양호하다’며 존 리드 교장 선생님에게 상으로 받은 책이었다. 소년은 자신의 책이 150여년 후 2만㎞ 떨어진 한국이라는 나라의 독자 손에 들려지리라 상상이나 했을까. 이 책은 어떻게 이곳까지 왔을까. 그러고 보면 이 책 자체가 로빈슨 크루소만큼의 모험을 한 것이 아닐까…. 헌책 한 권을 펴니 상상할 거리가 무궁무진했다.

지난 주말 서울 지하철 잠실나루역 근처의 ‘서울책보고’에 다녀왔다. 서울시가 빈 물류창고를 리모델링해 지난 3월 헌책방으로 오픈한 곳이다. 청계천 일대와 전국책방협동조합 소속 헌책방 29곳이 각자 서가를 분양받아 총 17만권의 책을 비치한 초대형 헌책방이다. 규모도 규모지만, 인스타그램 성지로 등극할 만큼 근사한 공간이기도 하다. 철재로 만든 32개의 서가 가운데로 터널처럼 통로를 냈는데, 통로가 일직선이 아닌 데다 아치의 높이가 달라 굽이치는 듯한 공간감을 만들어냈다.

인기는 숫자로도 확인된다. 평일에는 하루 700~800명, 주말 평균 3000~3500명이 찾는다는 게 관계자의 설명이다. 개장 당시엔 25개 헌책방이 12만권의 책을 들여놨는데 두 달도 안 돼 책 7만권이 팔렸고, 덕분에 참여 업체와 장서 모두 처음보다 불어났다.

헌책방 사장들의 반응도 좋다. “기대 이상이에요. 청계천에 60개 넘던 서점이 20개로 줄었을 만큼 업황이 나쁘니 처음엔 긴가민가했지만요.” 1977년부터 2대째 이어지고 있는 상현서림 이응민 사장의 말이다.

‘국내 최초의 공공 헌책방’을 표방하는 만큼 웬만한 책들은 3000원 정도로 저렴하고, 판매대금은 수수료 10%를 떼고 헌책방에게 돌려준다. 기업형 중고서점에 밀려 빈사 상태가 된 헌책방들의 숨통을 틔워줄 새로운 플랫폼이라는 점도 반갑지만, 이곳은 방문객에게도 충분히 흥미로운 곳이다.

‘안동 중앙국민학교 6학년 5반 ○○○’이라고 적혀있는 1953년도 ‘셈법’ 교과서나, 고려대 국문학과 87학번 학생이 밑줄 그어가며 읽은 ‘노동의 새벽’처럼 주인의 흔적이 남은 책들은 헌책의 낭만을 느끼게 한다. ‘진품명품’의 감별사가 된 양 전시된 초판본들의 가격을 가늠해보는 재미도 선사한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78년 초판은 50만원, 고우영의 만화 ‘삼국지’ 10권짜리 한 질은 200만원이다.

헌책방이지만 새 책도 있다. 한쪽 벽면을 채운 2200여권의 독립출판물들로, 매끈하게 규격화된 일반 출판사의 책들과 달리 기발한 개성을 담아 색다른 즐거움을 준다. 한상진 서울대 명예교수 부부가 기증한 책들을 훑어보노라면 석학의 개인 서재를 엿보는 기분을 맛보게 된다.

헌책방들을 그저 한데 모은 것 이상의 시너지를 내는 건 작은 부분까지 꼼꼼하고 치밀하게 살핀 기획과 운영의 힘이다. 처음 들렀을 때는 패션쇼가 열렸고, 두 번째 찾은 이날은 시민들이 자신의 헌책을 직접 파는 ‘한 평 책방’이 열렸다. 남의 손을 탄 책이 께름칙한 손님을 위해 셀프 책소독기가 마련됐고, 카페의 커피도 맛있다.

서울책보고는 이정수 서울도서관장의 표현처럼 도시재생을 통한 문화재생의 좋은 사례로, ‘책의 보물창고’라는 이름이 과하지 않다. 호평이 잇따르자 경기도에서도 비슷한 콘셉트의 헌책방을 검토 중이라고 한다.

절판된 신앙서적을 사서 편하게 읽을 수 있는 대형 탁자에 앉았다. 부인과 함께 온 듯한 어르신이 서가에서 골라온 책 몇 권을 옆자리에 내려놓으며 한마디 했다. “여기가 박원순 시장 작품이라는데, 여태 한 일 중 제일 낫구먼.” 그러게요, 어르신. 동감입니다.

권혜숙 문화부장 hskw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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