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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섬情談-장은수] ‘연애 시큰둥’ 사태



친구들끼리 만나면 자연스레 아이들 이야기를 한다. 자부도 있고 걱정도 있다. 오십 줄에 들어선 탓일까, 때때로 아이들 연애 또는 결혼 이야기로 호기심이 번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짝을 얻어 씩씩히 연애하는 아이들도 있고, 짝을 기대하고 애쓰는 아이들도 있지만, 요즘 대세는 아무래도 ‘연애 시큰둥’이다.

아이들이 통 연애에 관심이 없다. 연애에 관심 없으니 결혼은 멀고 멀다. 궁금해 지나는 길에 슬쩍 물으면, ‘남이야 연애하든 말든……!’ 소리 빽~~~. 이런 반응이 대세란다. 물론 다 큰 아이들 연애 감정까지 신경 쓸 까닭은 굳이, 별로, 절대로 없다. ‘부모가 된다는 것의 철학’(클)에서 미국의 철학자 진 커제즈가 말하듯 “아이가 부모를 해고하고 자기 삶을 직접 빚기”로 하는 건 정녕 환영할 일이다. 성숙한 아이를 ‘의존증 환자’로 상상하고, “아이들을 위해 이 세상을 더 안전한 곳으로 만들 수 있다”고 믿는 가짜 의사가 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완전한 ‘남’은 아니기에, 아이가 휴대전화로 누군가와 속삭일 때마다 은근한 기대로 신경줄이 쏠리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아이의 연애 여부는 어쩌면 중요하지 않다. 솔직히 말하면, 부모도 독립하고 싶다. 아이의 연애나 결혼을 부모 독립의 조건으로 생각지 않지만, ‘소리 빽’ 사태를 겪을 때면 ‘제발 독립을’이라고 호소하고 싶다. 어차피 겪을 일이라면, 아이 없는 삶을 한시라도 빨리 꾸리고 싶다. 하지만 부모가 아이를 해고하긴 힘드니, 언젠가 해고당하거나 스스로 독립하기를 바랄밖에. 연애의 역사적 존재론을 생각할 때 청년들의 ‘연애 시큰둥’은 한국사회 위기의 한 증후이기도 하다.

연애란 무엇인가. 운명대로, 즉 부모나 스승이나 사회가 정한 대로 살지 않고, 오직 제 안에서 박동하는 심장의 언어를 좇아 살기로 하는 일이다. 이 낭만적 사랑, 즉 연애의 언어는 중세 말 유럽에서 갑자기 출현했다. 그 원형은 서사시 ‘트리스탄과 이졸데’에 집약돼 있다. “연인들의 아름다운 몸속에서 생명이 전율하고 있었다. 그래, 죽음이여, 올 테면 와라.” 트리스탄은 연인을 보고 고동치는 심장에서만 삶을 느끼고, 그 경험을 부정하고 금지하는 엄혹한 사회질서를 추종하는 일은 죽음으로 받아들인다. 이것이 현대적 사랑의 출발이다. 오직 자기 감각이 경험한 것만 참되다고 믿는 행위. 감각하고 측정할 수 있는 것을 표준으로 하는 근대 경험과학과 사회로부터 분리된 개인이 이로부터 발현했다. 셰익스피어에 이르면 여성도 자기감정의 주체가 된다.

줄리엣은 말한다. “로미오, 당신은 왜 로미오인가요?/ 당신 아버지를 부정하고, 당신 이름을 버리세요./ 만일 그게 싫다면, 제 사랑이 되겠다고 서약만 해주세요./ 그럼 제가 앞으로 캐풀렛이라는 이름을 갖지 않을게요.” 사랑을 느끼자마자 줄리엣은 가문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자기 삶의 주인이 된다. 삶의 거짓 역할인 가문의 딸을 버리고 진짜 역할인 ‘사랑하는 여인’을 택한다. 로미오 역시 화답한다. “내 이름은 나도 싫소./ 그 이름이 그대의 원수니까요./ 그 이름을 내가 적었다면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소.” 줄리엣을 모방한 로미오는 자신의 낡은 정체성을 갈기갈기 찢는다. 집단 주체인 가문이 개별 인간을 대신하는 중세적 질서가 한순간에 무너져 파괴된다. 이처럼 사랑은 이름을 버리고 무명이 돼 제 손으로 이름을 다시 쓰는 존재를 창조한다. 사랑은 두 사람이 서로의 개성에만 집중하는 관계, 즉 연인을 발명한다.

‘연애 시큰둥 사태’는 오늘날 한국 청년이 처한 척박한 현실을 드러낸다. 학점에, 과제에, 자격증에, 어학에…. 스펙이라는 이름의 자기착취에 지쳐서 많은 청년들이 사랑할 힘을 잃은 세상이라니, 무섭지 않은가. 연애를 일단 취업 후로 미루는데, 괜찮은 직장은 ‘금수저 면허’로만 들어갈 수 있다니 끔찍하지 않은가. 청년이 느끼는 어둠만큼 한국사회의 미래도 어둡다. 청년들이 사랑조차 하기 어렵다면 우리는 분명 잘못된 길로 들어서 있다.

연애는 청년이 세계를 혁신하는 방법이다. 기성질서에서 벗어나 제 심장의 언어로 사회를 다시 적는 일이다. 인간이 세계를 보고 듣고 느끼는 방식이 변화할 때 낡은 사회가 혁명될 수 있다. 연애가 혁명에 선행한다. 청년들이 ‘연애 시큰둥’이 아니라 ‘연애 신난당’일 때, 새로운 사회가 열린다. 청년들한테 사랑을 허하는 일, 어쩌면 여기에 정체에 빠져든 한국 사회의 미래가 달려 있다. 어떻게 할 것인가.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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