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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사초롱-이종묵] 하루의 공과를 기록하시라



문예 군주를 꿈꾼 효명세자(孝明世子) 관련 전시회가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다. 효명세자는 순조의 아들로, 정식 왕위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대리청정을 하여 국정을 책임졌고 훗날 익종(翼宗)에 추존되었으며 또 그의 시문이 역대 임금의 시문만을 모은 ‘열성어제(列聖御製)’에 편입되었다. 어진 인재를 널리 등용하고 형옥(刑獄)을 신중하게 하며 만백성을 구제할 수 있는 정책을 시행하여 조선을 개혁하고자 하였지만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3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조선의 쇠망이 그의 죽음에서 가속된다고 보는 학자도 제법 있다.

옛글을 읽고 그에 바탕을 둔 글을 쓰면서 밥을 먹고 사는 나로서는 효명세자가 남긴 글이 관심사다. 그가 남긴 많은 시문 중 가장 눈길을 끈 것은 대리청정을 준비하던 1826년에 지은 ‘일륙과공과기(日六課功過記)’라는 짧은 글이다. 매일 여섯 가지 일과(日課)의 잘잘못을 기록한다는 뜻이다. 매일 힘을 쏟아야 할 항목 중 하나로 ‘과성(課省)’을 들고 종일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밤에도 깨우침이 없었는지 반성하고자 하였다. 그중 한 대목은 이러하다.

“밤에 누워 있을 때 홀연 대궐 바깥 가련한 민생이 떠오르고 한참 있다 보면 팔도의 창생들이 고생하는 모습이 떠오르니, 하루의 한 가지 공(功)이요, 독서를 오래 하지 않은 것을 깨닫고도 끝내 시작하지 않았으니 이것이 하루의 한 가지 과(過)요, 독서를 오래 방치할 수 없음을 거듭 깨닫고도 책상 위에 책을 던져두고 끝내 읽지 않았으니, 이것도 하루의 한 가지 과일지라.”

효명세자는 일과를 마치고 잠자리에 누워 오늘 한 일을 떠올렸으며 무엇을 잘하고 무엇을 잘못했는지 이렇게 일기를 적었다. 그리고 그 이듬해인 1827년 중희당(重熙堂)에서 대리청정을 시작하고 그해 겨울 이 일기를 ‘만기일력(萬機日曆)’이라 이름을 바꾸었다. 군왕의 수많은 업무를 두고 ‘일일만기(一日萬機)’라 하거니와, 효명세자는 하루의 수많은 일에서부터 한 달, 한 해의 공과가 결정된다 하여 이 이름을 붙인 것이다. 효명세자의 이 글에서 문예 군주를 꿈꾼 정치가와 독서인으로서 성실한 삶을 살고자 한 고심을 보게 된다.

효명세자는 문예에도 탁월한 능력을 보였거니와 글쓰기를 통해 늘 스스로를 돌아보았다. 스스로를 경계한다는 뜻의 ‘자경(自警)’이라는 글도 눈길을 끈다. “백성은 바로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이 견고해야 나라가 편안하다. 아, 임금이 한 가지 좋은 생각을 하면 온 천 리가 메아리처럼 응하고 한 가지 좋지 않은 생각을 해도 또한 그렇게 된다. 신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한 톨의 쌀, 한 오라기의 실인들 백성이 아니면 어디에서 생기겠는가?”라 하였다. 그래서 효명세자는 근본에 힘쓰는 집이라는 뜻으로 거처의 이름을 무본당(務本堂)이라 하였다.

맹자는 “남에게 다스림을 받는 사람은 남을 먹여주어야 하고, 남을 다스리는 사람은 남에게 얻어먹는다(治於人者 食人 治人者 食於人)”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스스로 밥을 먹을 자격이 있는지 반성하는 것이 정치하는 사람의 도리다. 송나라의 이름난 재상 범중엄(范重淹)은 밤마다 침소로 들 때 그날 먹은 음식의 비용과 그날 무슨 일을 하였는지를 두고 몰래 셈을 하였다. 그날 한 일이 쓴 비용에 걸맞으면 배를 어루만지면서 편안하게 잠자리에 들었고 걸맞지 못하면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한 채 새벽을 맞았다고 한다. 뜨끔하지 않은가! 밥값을 했는지는 생각하지 않고 좋은 밥을 먹고 맛난 술을 마셔 기분 좋게 배를 어루만지면서 잠들지는 않았는가.

정치하는 높은 사람에게 묻는다. 효명세자처럼 잠자리에 누우면 만백성이 고생하는 모습이 떠오르는지. 그들에게 권한다. 최소한 국민에게 밥을 얻어먹을 일을 하였는지를 일기로 남기시라고. 혹 선거에 나가 하루의 공과 과를 하나하나 적은 일기를 보여준다면 유권자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

이종묵 서울대 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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